나도 수 많은 블로그 글들에서 간신히 간신히 조각 조각 정보들을 모아 이 위업을 달성하였으니, 만인에게 이롭도록 여기 적도록 한다.

48시간 동안 삽질에 삽질을 거듭하고
파티션을 날려먹고, 초죽음까지 갔다가 이제 겨우 겨우 살려냈으니.
아래와 같이 하면 된다.

오늘은 너무 피곤한 관계로 간략 버전만 적는다.

1. 그냥 단일 파티션으로 OS X LION 을 설치한다.

2. 부트캠프로 WINDOWS 를 설치한다. 이 때, 보통 c드라이브 잡듯이, 운영체제 들어갈 정도만 잡아서 파티션 하면 된다. (나의 경우 80G 정도만 잡았음)

3. 윈도 설치후에 다시 맥으로 온다.

4. 맥에 잡아놓았던 파티션을 둘로 나눈다. 이 때, 맥 OS를 설치한 파티션을 윈도파티션처럼 적은 양만 잡는다 (나는 70G 정도). 그러고 나머지 용량을 exFAT 방식으로 파티션한다.

5. 재부팅하면 윈도부트섹터가 날아가 버려서 윈도 부팅이 안 돼. 그러므로, 부팅할때 윈도 CD를 넣고 옵션키를 눌러 부팅하면 윈도 CD로 진입가능. 
여기서 '시동복구' 를 해주면 부트섹터가 살아남.

6. 윈도 - 라이언 - 데이터하드 이렇게 3개의 파티션이 해맑게 웃고 있음.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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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지 얼마 안 돼서, 손님들을 집에 초대하던 무렵이었다. 집들이라고 해봐야, 집구경하고 밥먹고 하면 별 컨텐츠가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웨딩촬영이라던지, 신혼여행 사진을 구경하는게 관례(?) 비슷했는데. 그날도, 혼수품으로 마련한 42인치 테레비전에 정성스레 조립한 PC를 물려놓고 신혼여행에서 찍어온 5백여장의 사진들을 손님들 보시라고 친절한 해설과 더불어 픽픽픽픽 눌러 넘기고 있었다.

한참을 넘겼을까... 머릿속에 순간 '아차' 싶었다. 옛날처럼 사진앨범에 몇 십장 들어가는 게 아니고, 무려 수백장 또는 수천장의 사진들을 소비하는데에는 과거에 없던 '소비시간'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손님들 중에는 하품을 애써 참으며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있었다.

내 생각이 짧았던 것이다.

신혼도 잠깐, 아이를 낳고 키우다보니 이제는 스틸사진도 있지만, 순간순간 영상을 담겠다고 이런 저런 비디오를 많이 찍었다. 첨엔 별 생각이 없다가, 어느날 보니 찍어놓은 동영상만 몇기가(압축을 했을때 얘기). 시간으로 환산해도 도저히 이걸 다 볼 시간이 없다. 다 찍어놨다가, 나중에 나이먹고 실버타운 싸가지고 가서 돌려보는 걸까? 파일 탐색기가 됐던, 스마트폰 갤러리가 됐던 간에 동영상은 용량 큰 썸네일로서 자신의 존재를 묵직하니 드러낼 뿐. 내가 그 버튼을 눌러주기 전까지는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대로 있을 듯 하다.

Lytro 라던지, pelican 이라는 이름을 들어봤거나, 혹 그 두 회사가 사실상 비슷한 기술을 가진 걸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지 알아챌 수도 있을 것이다.



Light Field Camera 라고 소개되는 이 기술은 사진을 한 번 찍고 나서, 나중에 언제라도 원하는 피사체에 초점을 맞춰 사진의 깊이감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다. '애써 초점을 맞출 필요가 없다!' 라는 점에서는 혁신적일 지 모르겠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나중에 여유있고 시간 될 때 초점을 맞춰서 봐야한다' 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고, 이는 사진을 촬영하고 감상하는데 걸리는 시간에서 별도의 이득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사진을 세심하게 고민해서 찍던지, 아니면 별 생각없이 찍고 초점을 맞추던지 간에 절대적으로 걸리는 시간은 사실 같은 것이다. 다만 후자의 경우, 순간적으로 중요한 장면을 포착해야하는 사람에게 매우 유용한 기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이라면, 나는 보도 사진을 좀더 얕은 DOF 로 굳.이. 찍어보고 싶은 어떤 기자들에게 이런 기술이 쓸모있을까...를 잠시간 고민해본다. 

앞으로 돌아가서,
내가 신혼여행에서 찍은 500장의 사진을 Lytro 로 촬영했다면. 그리고 그걸 방금 오신 손님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면. 아마도 그 중간에는 500매의 사진을
1) 적정 포커스가 맞았는지 고민
2) 안 맞았다고 판단될 경우 포커스 수정

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나라면, 니콘의 셔터를 반쯤 눌렀을 때 "띠릭!" 하는 경쾌한 포커스음을 듣는 시간에 더 많은 가치를 두겠다. 특히, 2)번보다 1)번이 더 괴롭다. 더 많은 자유가! 그 자유가 오히려 번뇌를 불러올테니까. 그리고 1)번이 괴롭다고 느껴지면 당연히 2)번은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며, 사진 보정으로서의 Light Field Camera 는 의미를 잃어버린다. 

혹, 이런 보정의 관점이 아니라 사진의 깊이감을 조정하는 것 자체에서 쾌감을 누리고자 하는 Entertainment 의 성격이라면 이 것은 또 다른 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절대적인 시간을 잡아먹는 interaction 이고, 이것은 '사진감상'과는 또 다른 카테고리의 행위가 된다. 마치 내가 동영상 버튼을 못 누르고 여전히 썸네일로만 방치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일이 여기에서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 

이런 맥락 때문에, 나는 이것이 대단한 기술임에는 틀림없으나,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거나 기존의 카메라 시장을 잠식할만한 거대한 무엇이 되기에는 어렵다고 본다. 

아마도 Lytro 를 개발한 사람들은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이 만든 첫번째 카메라가 언뜻 보면 장난감같이 생긴 것도, 사실은 그들의 치열한 고민이 빚어낸 정직한 고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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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앉아서

생각 2011. 10. 31. 23:04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하린이 또래정도의 어린 남자아이를 포대기에 둘러업은 할머니 한 분을 보았다. 요즘의 멋쟁이 엄마들과는 달리, 정말 우리 시대에나 볼법한 포대기로 아이를 들쳐업은 할머니는 뒷문 바로 앞자리에 아이를 업은채로 앉아계셨다. 비교적 빠글빠글한 파마머리에 붉은색 비닐잠바, 그리고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파란색 포대기에 생뚱맞은 핸드백이, 보는 나로 하여금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하면서 그냥 살짝 울적한 마음도 든다.

아마도 이 늦은 시각에 시내버스 한켠에 할머니와 함께 오른 그 아이는, 어린이집 한구석에서 어디론가 일을 나간 엄마를 기다리다가 할머니 등에 업혀 돌아오는 길일지도 모른다. 멋쟁이 엄마들이 쓰는 '애기띠'는 오십견으로 고생하는 할머니가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을테고. 

무엇보다 내 마음이 짠했던 것은 아마도 그 아이의 몸놀림 때문이었던 거 같은데, 두어살 짜리라고 보기 힘들만큼 할머니 등에 업혀서, 아니 꽂꽂히 붙어서 어리광하나 없이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마도 그 아이에게 이런 것이 얼마나 익숙한 것이었는가를 되돌아보게 되고, 여태 버스한번 지하철 한번 제대로 탄 적이 없는 우리 집 아이를 떠올려보며 이 풍경이 주는 생경함과 측은함이라는 것이 내게 묘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 집에 자동차가 생긴 것은 내가 초등학교 3,4학년 때였다. 그 전까지는 물론이지만, 그 후로도. 엄마와 어딘가를 나갈 때에는 자가용을 타고 이동하기보다는 시내버스 한 켠에 앉아 30분이고 40분이고 그렇게 이동했었다. 물론, 엄마가 운전을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내가 중학교때 5천원정도 거리를 택시탔다고 아버지에게 무척 혼이 난 걸 보면, 그 때 그 시절에 우리가족은 버스 정도의 대중교통으로 움직이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할머니와 손자의 풍경을 보면서 내가 다시금 놀라는 것은.
내 어릴 적의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그런 모습을 '측은하게' 느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냐면, 그걸 측은하게 느낀다는 것은 나와 그들을 철저하게 타자화 하고 있다는 뜻이고, 은연중에 나와 다른 사람들. 나와 다른 계급이라고 내 머릿속에서 금을 긋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이 충분히 타기 편해서, 그리고 엄마와 아이들이 안전하게 탈 수 있는 환경이 될 수만 있다면야, 내가 이런 복잡한 생각도 안 하겠지. 비가 와도 하나 젖지 않는 지하 주차장에서 카시트에 폭신하게 앉아서 이리저리 오다니는 우리집 아이를 떠올려보면서, 나는 천상 미안하다는 생각만 가지고 버스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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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

생각 2011. 10. 24. 23:44
아, 방금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 2권을 읽기 시작했는데 대학때 아주 잠깐이지만, 기호학 수업을 들어놓은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사실 요즘 내가 구상하고 있는 작품들도, 어떤 점에서는 이 기호학 비틀기 내지는 기표와 기의를 해체 조합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사실 앞선 작가들이 이런 짓들은 많이들 해놓지 않았나 싶기도.
나는 그런 상황에서 뭘 새로운 걸 할 수 있으려나.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했는데.
마그리트 그림들이 그냥 마냥 초현실인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엄청난 사유. 특히 관념론과 실재론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들어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아... 나의 무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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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성

생각 2011. 10. 17. 23:26
일에 전문성이 생겨야 하는데 이거 내가 전문성이라는 걸 만들어가고 있는 건지 좀 애매할 때가 있다. UI만 줄창 팠으면 UI전문가가 되는 거고, 제품디자인만 줄창 팠으면 또 뭐 그런 게 되는 건데. 아... 이건 이리 찔끔 저리 찔끔 하고 있으니 뭐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게 없고. 나는 제네럴 리스트인가, 어줍자니스트인가.

드러커 아저씨가 뭘 파도 3년씩만 파면 전문가가 된다고 했는데, 세상이 내게 3년씩 주제 바꿀 수 있도록 해주지도 않고, 이건 퇴근 후에 하라는 건가요? 드러커님? 아니면 백수로 살면서 3년씩 공부?

세상 어디에 던져놔도, 누구를 만나도 자신의 전문성을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다. 나도 그런 재주 하나쯤 있음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게임 중에 대항해시대2 가 있었는데, 여기 나오는 캐릭터중에 내가 가장 애용(?)했던 캐릭터가 바로 '에르네스트 로페즈' (좌측 상단)
 

이 캐릭터의 장점은, 굳이 돈을 벌려고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거. 원래 업이 '지도 제작자' 이기 때문에, 그냥 돌아다니고 본국으로 돌아오면 그 즉시 통장에 입금완료. 지금으로 따지면 여행작가 정도? 그냥 돌아만 다녀도 돈이 나와요~

오늘 들은 이 시대의 로페즈 중의 하나는 영미권 네이티브 스피커들. 이들은 그냥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영어전도사'의 역할만 하면, 어디서라도 굶어죽을 일이 없으니 인생을 그냥 여행하듯 돌아다니면 된단다. 게다가 그냥 네이티브인 것을. 새로 뭘 배울 것도 없고. 

의사도 이런 점에서는 좋은 직업이라고 느껴지는 게. 세상 어딜가도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 일감이 없을 리는 없고. 다만 타인의 고통에 평생 노출되는 직업이니 그닥 달갑지만은 않다. 또,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라던지, 악기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다룰 줄 안다면. (아, 이것은 부가가치가 적은가?) 대충 오지에 떨궈도 밥은 먹고 살지 않겠나?

UX 10년하고, 오지에 떨어지면. 굶어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생각이 스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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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농협 하나로 마트에서 발견.
싸인패드에 직접 싸인을 하신 박재숙 님에 대한 포스팅은 여기

아마도 고객의 실수에서 힌트를 얻고 이런 '작업'을 하신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워낙에 싸인패드가 시간이 지나면 마모도 심하고, 안에 LCD도 약해지고 해서, 주민번호나 전화번호 따위를 자주 눌러야 하는 싸인패드로서는 이거저거 다치우고라도 숫자는 보여야 하겠기에. 

이런 과감한 시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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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식장 관계자님이 촛불을 우아하게 끄시는 모습에 찰칵.
꽃을 한 송이 뽑아드시더니, 꽃으로 자근자근 촛불을 눌러 끄시는데, 오... 이거 말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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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의 글쓰기

생각 2011. 10. 12. 08:38
요즘 읽고 있는 책은 나가오카 겐메이가 쓴 '디자인 하지않는 디자이너' 라는 책이다. 엄밀하게 말해선 블로그에 올린 일기 모음 정도인데, 책으로 나왔으니 책이지 뭐.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글의 깊이가 있던 없던, 누가 뭐라 하던 말던 간에. 디자이너가 스스로 글을 쓰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일들을 꾸준하게 해오는 것은 정말정말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여태껏 제대로 못해왔던 일이기도 하고. (아, 근데 나는 디자이너 맞습니까?)

논문쓰던 시절 말고는 하루에 A4 한바닥 정도의 글을 꾸준하게 썼던 기억이 없다. 일기라는 것도 제대로 써내려간 경험이 없고. 꾸준하게 글을 내고 있는 다른 친구들의 블로그를 훔쳐보는 것은 잘 해도, 정작 나는 내 생각을 글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으니, 정리되지 못하고 정체되어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트위터가 좋은 점은 통찰있는 선배들의 한 두 마디 속에 담긴 혜안을 발견하는 것인데, 문제는 그 통찰에 눌려 나의 생각을 드러내질 못한다는 것이다. 읽어낸 텍스트도 적고, 연구자로서의 기간도 부족하고. 디자인에 대한 내 생각을 함부로 꺼낸다는 것이 얼마나 쉽게 공격받는 일인지를 아니까. 그런 냉소 덕분에, 여태 글 한자를 제대로 써내려가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다시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인 것 같다. 누군 처음부터 혜안이 있고 통찰이 있었을까. 

같은 맥락에서 책을 내는 선배들을 보면, 부러우면서도 한 번의 벽을 쌓는 느낌이랄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활자들을 읽어치워야 저 정도의 공력이 쌓이며, 책이라는 것을 내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한때, 은경이는 검프님이 책을 쓰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표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책을 낸다는 것은 다소 무모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예전에 누군가의 말처럼 적진 한 가운데서 벌떡 일어나 '나를 쏘시오' 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논문과는 달리,책은 돈 들여가며 찍어서 또 대중에게 돈 받고 파는 것이니 만큼 돈 값을 해야한다는 부담도 있고. 해천선배님 존경합니다. ㅡ,.ㅡ

여기 블로그에 올라온 observation 들을 책으로 내볼 생각도 오래전부터 했다. 이런 류의 책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고. IDEO에서 출판한thoughtless act 라던지, N
on intentional design (Uta Brandes/Michael Erlhoff공저)같은 것들이 있긴 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관찰은 관찰자의 주관이 포함되는 것이니 만큼, 책으로 나온다고 의미 없는 것은 아닐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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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새로운 것을 제안하는 것이 옳은가?
요즘은 이런 질문에 많이 사로잡힌다. 흔히 말하는 Y+1,2,3 의 개념보다는 '얼마나 대중이 쉽게 포용할 수 있는가?' 또는 '얼마나 많은 새로움을 대중은 한 번에 소화할 수 있는가?' 와 같은 내용.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쉽게 인지하고 사용하는 기능들이 있다. 이를테면 두 손가락으로 화면을 pinch zoom 한다던지 하는 인터랙션은, 굳이 별도의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제 다들 그런 줄로 알고 쓴다. (물론, 이 기능에 대한 소개는 애플의 아이폰 keynote 를 통해서 충분히(?) 설명되긴 했다만)
그런데, 이제와서 보니 그게 참 쉽다는 게지, 설명 없이 아이폰을 산 아무개씨가 그 기능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일 아니었을까? 그럼 그 기능 만든 사람 혼좀 내야하는걸까?

우리가 지금 제안하는 많은 컨셉들도 이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되게 과한 기능이라던지, 자연스럽지 않거나, 어디 깊숙히 들어가야 겨우 trigger 를 찾을 수 있는 그런 기능들까지 '사용자들에게 편리하다' 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비교적 높은 빈도로 우연하게라도 그 기능을 찾을 수 있도록 디자인 되어 있다면, 그 기능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다고 해서 애초부터 탈락되거나 비난 받는 건 좀 부당하지 않나? 또, 애지간한 USP 로 써먹을 만한 경험이라면 굳이 설명을 해가면서라도 사용자에게 이해시켜서 쓰는 게 요즘 세상 아니던가? (갤투의 밀당 기능은 맨 처음 screen 상의 매뉴얼이 작동함)

또 하나의 다른 이슈는, 하나의 신제품에 피로도가 높은 새로움들이 들어차는 것. 이것은 기능 자체가 과하다기 보다는, 기능들의 합이 전달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주의해야할 부분이다. 물론, iOS 는 새 버전마다 자잘한 feature 변경이 200여가지나 된다지만, 실제로 사용자가 체감할 수 있는 것은 10여개 안 팎이고, USP로 강조하는 것은 3~4개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이 사용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새로움의 피로도를 적당 수준으로 맞추기 위함이다. 물론, 이런 줄 알고 샀더니 200여개의 다른 피쳐들이 쉴새없이 튀어나오면 피곤하긴 마찬가지겠지.

아, 오늘도 고민이다.
내부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한 똥 싸다 끊는 듯한 이 컨셉 자르기의 지저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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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디자이너의 역할' 이라고 이름 붙이려다가 생각해보니, 너무 포괄적인가 싶어서 컨셉디자이너라고 이름 붙이기로 했다. 내가 하는 일이 엄밀히 말하면 그런 거니까. 하지만 이노무 컨셉이라는 단어도 워낙에가 뜻하는 바 넓다보니, 누군가 또 검색해 들어와서 잔뜩 오해나 하지 않을런지 모르겠네.

요즘 드는 생각은 우리직군(컨셉디자인, 기획, UX 등)이 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일이 정말 가치있는 일인가? 라는 것.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다소 궁색한) 우리 역할의 근거란 '엔지니어들은 기술만 알고 쓸 줄을 모르니까요', '사용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디자이너 아니겠십니까?' 라는 자신감넘치는 포부였는데, 어째 필드에 나와보니 진짜 엔지니어들은 사용자들도 잘 이해하고 있고, 우리가 입으로 몇달 떠들 사이에 실물이 나와서 이미 굴러가고 있더라.

그 레벨이 안 되는 엔지니어나, 혹은 또 다른 부서의 기획자들은 '너희 디자이너 나부랭이들이 기술이나 시장현황을 제.대.로 알어? 이게 되는 소리야?' 라며, 살가운 대접을 해주고.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ideal 한 경험이에요" 라고 목소리를 먼저 내보고, 잘 안 먹히면 "요정도는 feasible 한 경험이에요" 라고 한발 물러서기 일쑤. 

이게... 회사라는 조직구조의 문제일까?
아님 엔지니어가 너무 사용자 친화적이 되어버린 건가? (아, 여기서 말하는 엔지니어는 회사내부도 있지만, 현세에 같이 숨쉬고 있는 많은 개발자들을 포함한다. 그들은 지금도 모처에서 스마트폰 어플 같은 것을 만들어내고 있고, 사회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갈수록, 컨셉을 만들고 비전을 제시하는 디자이너의 설 땅이 좁아지는 것도 같고.
그 이면에는 '공부 안 하는 디자이너' 들이 있지 않나 (나 포함) 생각도 해본다.

제너럴 리스트가 되라고 부르짖었건만. 이도저도 어줍잖게 하는 어설픈 디자이너가 되었거나, 어디가서 자리 깔아도 먹고 살 수 있을만한 미래적 통찰도 없이 이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것일수도.

원튼, 원치 않든, (하다보니) 3~4년을 현업에서 이짓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끊임없이 되묻지 않고서는 이 일을 온전히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직 답을 못 찾았고, 찾고 있는 중. 아마도 이런 류의 글을 계속 쓰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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