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찾기

생각 2014.11.03 07:13
오늘은 우리 부부가 교회학교 활동담당을 맡게 되었다. 주제가 있고, 그 주제에 대한 활동을 지도하는 식인데, 오늘 주제가 바로 '안식일' 이었다. '안식일' 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나는 곧바로 '주 5일제 근무' 라던가, 토요일을 안식일로 주장하는 것을 쟁점으로 하는 몇몇 이단들, 카톨릭 교회, 토요일이 맞는가 일요일이 맞는가 하는 논쟁 따위를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늘 언제나 답은 미완인 채로 여태 미뤄두었다. 신앙생활에 큰 지장을 주지 않기도 하거니와, 신학적으로도 아직 분분하다는 내용을 굳이 내가 뭐하러 덤빌 필요가 있나 싶어서였다.
허나, 어제 아내가 촉발한 문제제기 - 정말 문자적으로 마치 유대인들처럼 쉬는 것이 옳은가? - 덕분에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좀 더 명확해져야 할 필요를 느꼈다. 사실 아내의 문제제기는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의 판단 보다, 남편인 내가 주말이나 토요일에 나가서 활동하는 것을 꺼린다는 심증을 재차 확인해보고 싶은 데 있었다. 그러니, 나는 이 주제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여러모로 나의 신상에 좋은데, 첫째는 내 스스로가 행동의 근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 좋고, 둘째로는 이를 명확히 해 둠으로써 아내와의 기질적 차이 혹은 신념적 차이로 생기는 문제들을 새롭게 중재해볼 기회를 갖는 것이다.

우선 안식일에 대해 내가 지난 25년간 교회를 다니며 줏어들은 것들을 나열해보면 이렇다.
- 하나님은 창조하시면서 제 7일에 쉬셨다.
- 쉬신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안식일'을 창조 하셨다. 쉰다는 개념 자체도 만들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 엿새를 힘써 일하라는 말씀이 있다.
-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이 십계명 중에 하나 있다.
-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금요일 부활하신 요일은 일요일이다.
- 창조 첫날은 '빛'의 창조이다. 
- 일요일은 한 주의 첫 날이다. 주말이 아니다.
- 유대인들이 안식하는 날은 토요일이다. (금요일 밤부터 쉬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식일에" 로 검색한 성경 말씀
- 누가복음 13: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 누가복음 4:31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  이사야 58: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 이사야 66:23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
- 사도행전 13: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 분명히 있다. 쉴라면 쉬고, 일하려면 일해라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준엄하게 '쉬어라' 라고 명령된 것이므로 지켜야할 필요가 반드시 있다는 뜻이다. 둘째로는 개인의 오락을 구하는 것을 삼가는 수준의 '거룩'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사야 58장 13절 말씀을 보면,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이라고 되어있다. 이래서 예전 목사님들은 주일에 시험공부도 하지 말고, 영화관도 가지 말라고 하신 거다. 

안식일에 무엇을 하면 되나?

성경 말씀을 살펴보니 안식일에는 예수님조차도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으로 되어있다. 아무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빈둥 집에만 있자니 그것도 참 무료한 편이고, 게다가 하나님이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고 예배하라고까지 하셨으니 (66장 23절) 예배와 안식일은 아무래도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안식일에 모여서 성경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서로 이야기하는 것 정도가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모습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안식일에 예배하는 것은 맞는 것 같은데, 예배한다고 안식일이 되는 것은 아니기때문에 이것은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일요일이 왜 한 주의 첫날인가?

이 부분은 성경에서 정해놓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기원을 찾아보니, 주로 로마시대에 달력을 재정하면서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일요일이 첫날인 것은 맞는데, 그 날을 휴일삼고 예배하도록 하는 것이 로마의 칙령으로 만들어지고 이후 계속된 것이다. 사실상 그전까지는 기독교인들은 제 7일인 토요일에 안식하고 예배까지 하던 것을 이제 반강제로 일요일에 예배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일요일은 부활절과도 겹치므로, 부활축제의 개념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활절 축제 - 예배"를 매주 반복한다고 보면 비슷할 듯. 

그럼 뭐가 맞는거야?

1. 예수님 시대까지는 안식일 = 토요일 = 예배 세트가 작동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게 레퍼런스로 확실한 듯 함.
2. 로마시대에 달력 만들면서 예배를 일요일로 강제 쉬프트 작동했고, 부활절 = 예배 세트가 더 강해진 듯. 안식일 = 토요일 고리는 남아있지만 예배만 일요일로 쉬프트. 물론 로마에서는 일요일을 휴일로 공표했고. 안식일, 일요일 이렇게 이틀이나 쉰건가?
3. 엿새 일하라는 건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 건가? 원래대로라면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엿새동안 힘써 일하고, 토요일에 쉬면 된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이 안식일이 일요일로 강제 이동해버렸기 때문에,
1)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를 엿새로 보고, 일요일에 쉬는 방법.
2) 일요일에서 금요일까지를 엿새로 보고, 토요일에 쉬는 방법.
이 두가지가 존재하게 된다.
문제는 지금 일요일에 이미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안식일'에 드리는 예배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부활축일' 로서의 예배로 보아야 하는가의 입장이다. 
사실상 안식일로서의 예배로 보아야 하는 것이, 부활축일은 매주 반복되는 개념으로 보기 어려우니 안식+예배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면 본래와는 맞지 않지만, 어쨌든 일요일이 현재로선 휴일로 재정되어 있으므로, 이 날을 안식일로 '활용'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미 달력을 만들면서 날짜와 요일들도 몇번씩 이동했기 때문에, 지금으로선 누구도 제대로 된 토요일이 언제인지 일요일이 언제인지 장담할 사람이 없다. '일곱번째 날' 과 같은 서수형태의 표현으로도 미루어 볼 수 있듯이 이건 반복이 중요한거지, 2014년 11월 2일이 정말 일요일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다. 
이렇게되면 1번: 월~토 를 힘써 일해야 할 '엿새' 로 보는 것이 맞게 된다.
그렇다고 주 5일제를 반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언젠가 보니, 이런 근거로 주 5일제를 반대하고 엿새를 일해야 옳다고 하시는 분 계시던데, 사람이 꼭 회사 나가서 출근하는 것만 일이 아니다. 나는 이로 인해, 토요일을 가장으로서 확실하게 '근무' 해야하는 근거가 생겨버렸다.

일요일에 쉬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현대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또 하나의 쟁점은 이것이다. 일요일에, 우리는 쉬는가? 
많은 크리스천들은 예배한다. 그리고 쉰다. 하지만, 예배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크리스찬들은 일요일에 쉼보다는 노동에 가까운 활동들을 하게 마련이다. 예배를 준비하고, 성도들의 식사를 마련하고, 차량봉사를 하기도 하고, 주보를 만들고 문자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쉬어야 한다. 그래야 이 모순에서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모든 건 언제 다 하나? 토요일에 하면 된다. 토요일은 아직 쉬는 날이 아닌 '주말' 이다. 우리가 예배하고 안식해야할 '일요일' 에 대비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노동. 그 노동을 위한 날로 토요일이 적격이다. 
그리고 정말 주일은 쉬어야 한다. 몸과 마음이 모두 쉬어야 한다. '보시기 좋았더라' 라고 하셨던 창조의 기쁨과 함께 쉬셨던 그 안식일. 우리도 몸이 쉬며 마음은 하나님의 창조의 기쁨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예배를 만들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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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온지 한달이 조금 넘어간다. 낯선 풍경들은 조금씩 익숙한 것이 되어가고, 낯선 표정들도 하나둘 한국의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여전히 낯선 것들이 있는데, 이곳의 관습과 제도 같은 것들이 그렇다. 시간이 좀 걸린다.


여전히 답답한 것중의 하나는 식당에서 종업원을 부르는 일이다. 정확하게는 종업원을 부른다고 할 수가 없는게, 종업원을 부르는 법이 없다. 그냥 손님은 앉아서 기다리고, 종업원이 찾아와서 묻는다. 그러기 전까지는 결코 그들을 불러내는 법이 없다. 나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데, 여기 친구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하다. 


음식을 주문할 때는 물론이며, 계산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밥을 다 먹었는데도, 하염없이 기다린다. 나같으면 빨리 불러서 돈 쥐어주고 떠나는 게 더 맞지 싶은데도, 세월아 네월아 하고 기다린다. 답답해 죽겠어서 내가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 라고 묻는데도, 아니란다. 그냥 기다리면 된댄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것이 서비스직을 대하는 그들의 전반적인 태도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거 아니었나? 라는 생각을 또 해보기도 한다. 우리는 식당엘 가면 종업원을 마치 자기 집 종 부리듯 막대하는 경향이 있다. 반말을 쓰는 사람도 더러 있고, 서비스가 좀 맘에 들지 않으면 호통을 친다거나, 머리카락이라도 나오면 아주 뒤집어지는 사람들. 우리는 서비스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받을 때, 그들의 인격까지도 돈을 주고 샀다고 생각하는지, 하대하는 것을 쉽게 생각한다. 손님만 그렇게 생각하면 모르겠는데, 사업주들도 마인드는 거기서 거기다. '서비스정신'이라는 미명하에 손님 옆에 무릎을 꿇려서 주문을 받거나, 말도 안 되는 '음식 나오셨습니다' 따위를 말하게 하는 것들. 이게 정말 서비스 정신인가? 


하지만 그들 역시도 직업인이고, 전문가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그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온전히 존중한다면, 이들의 행동 역시 조금은 이해가 간다. 종업원들도 제나름 열심히 일하고 있고, 손님을 찾아다니며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데 내가 굳이 불러 세울 것이 무언가? 그들의 전문적인 영역을 굳이 내가 끼어들어서까지 지적해야하는가? 여기 내가 있으니까 좀 봐달라고? 서빙하는 사람이 그 정도 눈치 없을까봐서? 이들은 이들의 전문영역을 터치하지 않는 것이다. 기다리면 알아서 올 것이라는 믿음은 거기에서 출발한다고 봐야한다.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속터지게 기다리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이것을 하나의 극단으로 본다면, 다른 극단에 있는 우리로서는 충분히 이동할 여지가 있어보인다. 빨리 빨리 테이블 회전을 시켜야하는 사장님의 조급함만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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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eveloper.android.com/preview/material/index.html

에 나온 내용들을 중심으로, 디자이너들이 알아두면 좋을 내용들을 추려본다.


* The Android L Developer Preview supports drawable tinting: you can define bitmaps as an alpha mask and tint them using a color resource. You create these assets only once and color each instance to match your theme. Drawables also now support specifying most XML properties as theme attributes.
Tinting을 위한 컬러 리소스로 비트맵 이미지를 활용할 수 있게 됐다. 기존에는 컬러값을 코드로 지정하고, 그것을 불러다 사용했는데, 이제 비트맵 이미지에 투명도나 컬러를 입혀서 그걸 가지고 Tinting 작업을 할 수 있다(전체적인 브랜드 컬러를 유지하는게 가능). 옐로우톤으로 유지하던 전체 디자인을 비트맵 이미지 하나 바꿈으로써 그린톤으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얘기.

*Bitmap -> Primary color libraryThe Android L Developer Preview Support Library includes a color extraction library that lets you automatically extract prominent colors from a bitmap image.
예전에 어떤 앱에서, 앨범아트의 가장 주된 색상을 뽑아다가 앨범 제목 텍스트에 입히는 것을 보았는데, 대략 그런 내용이다. 비트맵이미지에서 가장 대표적인 색을 하나 뽑아내주는 라이브러리가 탑재됐단 얘기. 

* Specify the elevation of your views to cast appropriate shadows.
material 디자인에 깊이(depth 라고 쓰지만 정확하게는 높이가 더 맞지 싶다?)개념이 들어왔다는 얘기는 익히 도는 소문대로. 근데 이 깊이를 지정하면 그림자 모양이 조금씩 달라져서, 화면에서 멀고 가깝고의 느낌이 달라짐.

*Rounded corner

<shape xmlns:android="http://schemas.android.com/apk/res/android"       android:shape="rectangle">    <solid android:color="#42000000" />    <corners android:radius="5dp" /></shape>

css의 border-radius 처럼 Round corner 값을 지원(이건 이미 있었음).


*outline
You can also create outlines in your code using the methods in the Outline class, and you can assign them to views with the View.setOutline method.
역시 css의 border  속성처럼 outline 도 지원하기 시작한다는 거. 

이렇게되면, 왠만한 카드타입, 박스타입의 디자인들은 비트맵으로 구성된 나인패치 없이도 그려낼 수 있게 됨. css의 초기버전쯤 지원한다는 얘기?

*Cliping views
Clip a view to its outline area using the View.setClipToOutline method (round, rounded rect)
이미지 클리핑 역시 지원되는데, 사각형(이걸 클립핑이라고 봐야하나?), 원형, 둥근모서리 사각형 등등을 지원한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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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놀이

생각 2014.06.18 20:09
#diary

둘째 녀석은 공놀이에 아주 환장을 한다. 꼭 공이 아니어도, 둥글어서 굴러만 가는게 있으면, 아 눈이 두 배는 커진다. 아직 말을 잘 못해서 '꼬옹~!' 이란 말을 힘주어 내뱉기도 하고, 애 엄마가 처음에 ball 이라고 가르쳐놓은 것이 있어서 여차하면 '뽀올~!' 하는 말도 한다. (더군다나 그런 동그란 것이 하나도 아닌 네 개나 달려있는 자동차는 두말할 것도 없다.)

아무튼, 공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이 조그마한 녀석 때문에 우리집이 온통 공 천지다. 아직 축구공이나 농구공 같은 것을 다루기엔 너무 어리다보니, 장난감 공으로 줄 수 있는 것들이 탱탱볼이나, 말랑말랑한 헝겊공, 혹은 구멍이 숭숭 뚤려서 외곽으로만 뻐대가 있는 공 같은 것들이다. 아무리 던져도 혹은 맞아도 그리 아프거나 다치기가 어렵다. 덕분에 집안에서 아들녀석과 놀아주는데 이런 공놀이만큼 좋은 게 없다.

이렇게 공에 집착하는 아들녀석과 달리, 사실 나는 공이라는 물건에 대한 별다른 추억이 없다. '공'을 돈주고 사본 것은 아마 초등학교때 방영했던 '피구왕 통키' 라는 만화 덕에 하나 들여놓은 형광색 피구공이 전부였던 거 같고, 농구나 축구에는 전혀 조예가 없었으므로 그런 것들 역시 돈주고 집에 들여놓은 역사가 없다. 사지 않았던 것은 돈이 궁해서라기보단, 내가 흥미가 없었기 때문인데, 하여간 둥근 것과 몸이 직접 닿는 거의 모든 종류의 스포츠에 나는 참 약했다. 농구도, 축구도 그 나이 또래 애들이라면 누구나 열광했을 법한 스포츠였는데, 나의 유년기 그리고 청소년기에는 이런 '공'과의 애틋한 추억이랄 게 딱히 없는 것이다. 

그랬던 내가, 요즘은 공놀이에 제법 취미가 붙었다.
여전히 축구공이나 농구공은 없지만, 아들녀석이랑 놀면서 맛들인 자그마한 탱탱볼의 묘미에 빠져서 온갖 현란한 발동작으로 공을 갖고 노는 것이다. 공이 약하고 말랑 말랑하다보니, 나처럼 공을 잘 못다루는 사람도 앤간한 발동작으로 이런저런 '볼컨트롤'이 가능하다. 공중에 서너번은 제기차듯 차올릴 수 있고, 당구에서 빨아치듯이 되돌아오게 볼을 굴려보기도 하고, 내가 원하는 높이로 과녁을 맞추듯이 발로 탁탁 차올리는 것도 가능하다. 애는 되려 공놀이를 못하고 있는데, 내가 더 열심인 날도 많다. 삼십년을 외면했던 공과 다시 마주하니 반가워서 이러나?

불현듯 스쳐가는 공과의 미약한 추억이 하나 있긴 하다. 중학교 시절, 점심시간마다 나가서 남들 다하는 축구를 놔두고 나와 단짝 둘이서 '족구'를 했던 기억이 있다. 네트가 있기를 하나, 뭐 족구장이 있을리 만무하고. 그저 운동장에 금 하나 그어 놓으면 시작할 수 있어서 편리한 맛에 나와 단짝 둘이서만 주고 받고 하며 점심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툭 툭 신선놀음하듯 차고 있으면, 시간도 잘 가고. 어디 멀리까지 분주하게 다닐 필요가 없어서 내 성격에는 잘 맞았던 거 같다. 내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나름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축구좀 하는 친구들이 가끔 와서 같이 차면, 족구를 몇달 찬 나보다도 훨씬 현란한 공놀림으로 나를 풀이 죽게 만들곤 했다. 이러니, 미약한 추억도 그저 쓸쓸하게 기억될 뿐이리라.

그 쓸쓸함에 대한 보상심리일까. 오늘도 아들과 좁아터진 집안에서 차고노는 이 앙증맞은 탱탱볼. 아무도 뭐라 하는 이 없고, 내가 그저 즐거워서 차고 노는 이 둥근 물건 덕에 나는 일상의 소소한 재미를 선물받았다. 모르지. 나도 이 참에 공놀이에 재미좀 붙여서 나중에 대통령 선거 나갈 나이쯤 되면, 피파 위원 하셨다는 어느분처럼 동네 아저씨들이랑 조기축구 하고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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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가 한국을 뒤 흔들고 있습니다.

그 많은 어린 넋들이 꽃을 피우기도 전에 어른들의 잘못으로 바다에 묻히는 것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선장과 선원들이 먼저 빠져 나오지 않고 제대로 대처만 했어도 구할 수 있었기에 더욱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관료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관계자들이 제대로 훈련이 되었으면 정부가 이렇게 허둥대질 않았을 것이기에 고통은 무력감으로 변합니다. 

-> 관료주의, 무능한 구조, 시스템에 대해 우선 한번 짚음. 그러나 이 문단을 집어넣는 이유는 이 전체 글에서 이 부분에 대해 비판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초두에 넣는 것. "이 부분에 대해서 나도 비판한다" 그러나... 로 이어가기 위함.


그러나 참사 뒤 여기에 대처하고 반응하는 정부와 국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세월호의 본질적인 문제점이 선장이나 선원, 선주에게만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월호는 한국 사회의 총체적 부조리와 문제점을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 글의 핵심 문장. 이 사건의 본질적 문제는 한국 사회 총체적 부조리라는 주장.

    

마지막 선객이 구조될 때까지 배를 지켜야 하는 명예와 책임을 팽개친 선장이나, 선객들을 남겨두고 도망쳐 나온 선원들은 큰 벌을 받아야 하지만, 온 국민들의 격한 소리가 어쩐지 공허하게 들립니다. 손가락질하는 한국인들의 욕설이 과격해지고, 유가족들의 분노가 격앙될수록, 참사를 정치적으로 계산하는 정치꾼들의 꼼수가 두드러질수록, 그리고 이것을 확대 재생산하는 언론의 북소리가 커질수록 이러한 느낌은 깊어집니다. 여기에 모두 한국의 자화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 한국 사회의 총체적 부조리의 단면으로 1) 욕하는 한국사람들 2) 정치꾼 꼼수 3) 확대 재생산하는 언론 을 꼽고 있음. 어째서 총체적 부조리의 단면이 1) 재난 대처능력이 없는 정부 2) 구조보다 의전에 신경쓰는 관료들 3) 비판하는 목소리조차 억압하는 공권력 같은 것들이 될 수는 없는지? '한국사회의 의식문제' 라는 커다란 프레임으로 결국 반정부적 목소리를 폄하하려는 의도가 있는 글임. 


세월호 참사는 독립된 사건, 우연한 참사가 아니라 한국 사회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습니다. 세월호는 한국인의 정신과 의식 문화가 반영된 한국 의식 문화의 자화상입니다. 선장 선원이 도망쳐 나온 것을 거품 물고 욕하지만, 한국 사회에는 선장 선원과 비슷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다수 국민들의 잠재의식 속에 선장과 선원들이 있을겁니다. 선장 선원이 어쩌다 돌출한 별종의 사람들이 아니라,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의식 문화의 산물일 것입니다. 

-> 선장 개인의 범죄가 아닌, 한국인의 의식문화가 빚어낸 참극. 그렇다면 한국인의 의식문화중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를 생각하게 됨.


미국 군대에 갔다 온 어느 한인 젊은이의 이야기입니다. 미국 교관이 신병들을 훈련시키면서 "빨리!빨리!" 라고 계속 고함을 쳤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이 젊은이는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미국 군대에서 미국인 신병을 교육시키는 미국 교관이 "Hurry! Hurry"대신에 "빨리!빨리!"라고 외쳤으니 말입니다. 미국 젊은이들은 빨리, 빨리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지만 몸을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 차렸다고 합니다. 이 미국 교관이 어떻게 "빨리,빨리"를 소리치게 됐는지 모르지만

,모르기는 몰라도 이 교관은 주한 미군 출신일 것입니다. 한국에 있으면서 한국의 성급한 문화,빨리 빨리 문화를 목격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사례는 코리안 아메리칸 직장에서 일한 타인종에게도 많습니다. 미국의 한인 세탁소나 식당에서 일한 히스패닉들은 제가 코리안줄 알면, 많은 경우 "빨리 빨리"라고 말하면서 한국어 실력을 자랑합니다.

    

한국인 의식 속에는 절제하는 브레이크 보다는 속도를 내는 엑셀레이터가 지배적입니다. 빨리 빨리 성공해야 하고,빨리 돈 벌어야 하는 조급함과 각박함이 본능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빨리 빨리 문화는 한국이 선진국으로 부상하는데 원동력이 되었지만, 균형과 절제력을 잃으면서 한국을 침식시키는 부식제가 되고 있습니다.

-> 쉽게말해 '빨리 빨리' 문화. 속도와 경쟁의 문화가 문제라는 얘기. 이에 대한 문제의식에는 공감할 수 있음. 그렇다면 속도와 경쟁문화가 어떻게 세월호 참사를 빚어냈는가에 대한 전개가 필요.


50세가 되면 은퇴를 걱정해야하고,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 남아야하고,돈과 권력의 줄이 있어야 사람 대접을 받는 사회에서,너그럽고 여유 있는 인간의 삶이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자기보다 못한 친구를 왕따 시키고 폭력까지 행사하는 학생들이 늘어가고, 스승이 제자를 꾸짖을 수 없는 교육으로 전락하고, 속이고 모함하는 일이 일상에 자리잡고, 부모도 재산이 없으면 푸대접 받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사회에서 품위 있는 삶과 인격을 유지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 이 문장까지는 위에서 이어져오는 맥락에 부합함. 

의견이 다르면 집단적으로 언어 폭력을 하고, 자기 주장을 위해 상대를 인격 살인을 하는 집단 떼 문화, 억지 떼 문화의 광기 사회에서 합리성과 균형감각이 설자리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밟고 누르고라도 올라서지 않으면 내가 도태되는 사회 풍조에서, 나라에 충성하고,인간과 사회에 헌신하고, 시대적 사명에 열정을 바쳐야 한다는 가르침은 빛바랜 깃발이 되고 있습니다. -> 억지 떼문화, 광기의 발현이 바로 빨리빨리 문화와 경쟁사회에서 촉발되었다고 주장하는 것. 그러면서 그 때문에 빛바래는 가치로 충성이나 헌신을 들고 있음. 이 글에서 아주 치명적인 논리비약 중의 하나이면서 저자의 의도가 드러나 있음. 

첫째, '나라에 충성하고', '인간과 사회에 헌신' 하고, '시대적 사명에 열정을 바치자' 라는 가르침은 어떻게 억지 떼문화로 인해 그 가치가 낮아질 수 있나? 연결고리가 없음. 하지만 아래 문단들을 읽어보면 결국 이 문장의 주장은 '구조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는 정부와 잠수사, 해경에게 유족과 정치꾼들은 잘못된 한국인의 자의식의 발로로 비난을 위한 비난을 일삼는다는' 주장. 

둘째, 결국 이 문장을 다시 풀이하면 세월호 사고의 원인보다 사고 이후의 국민여론에 대한 비판이 목적임. 즉, "'속도와 경쟁문화' 가 세월호 참사를 빚었다" 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가 아님. 

   

이런 의식문화와 가치관에서 아름다운 인성이 형성되고, 나를 희생해서 남을 구하는 숭고한 인간 정신이 자라기 힘듭니다. 교육이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지식 로버트를 생산하는 입시 위주의 기능주의가 되는 풍조에서 세월호 선장과 선원이 대량 생산될 수 밖에 없습니다.

->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은 것이 입시위주, 속도경쟁문화 때문이라는 주장. 선원이나 선장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당연. 하지만 바로 윗문단에서 언급한 '억지 떼문화, 광기의 발현' 등등이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 모습과는 연결되지 않음. 

    

화물을 너무 적재한 것만 제대로 점검했더라도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하지만, 법과 규정을 안 지키는 것이 어디 세월호 뿐이겠습니까. 왜 해양 마피아를 척결하지 못했고, 왜 외화를 빼돌린 선주를 그냥 두었고, 왜 공무원들이 우왕좌왕 무능하고, 왜 재해 예방 안전 훈련을 하지 않았느냐고 질타하지만, 이것이 어디 세월호에만 있습니까. 한국 사회 곳곳에 부정부패가 켭켭이 쌓이고, 무사안일, 적당주의, 형식주의가 적폐된 사회에서 또 다른 세월호가 시한폭탄처럼 기다리고 있습니다.

-> 얼마든지 공감 가능한 일반적인 내용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이 파란색 옷을 입었다고 시비를 거는 시민이나, 교육부 장관이 사고 현장에서 컵라면 먹는 것을 문제삼은 기자 수준이나, "계란도 넣지 않았는데…"하고 대답한 청와대 대변인의 논평을 인터넷 신문 1면 톱으로 선동하는 명색이 주류언론의 수준 또한 한국의 자화상입니다. 이성과 합리성이 실종되고 감정과 억지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본질을 벗어나 지엽적 시비를 거는 것 또한 한국 의식의 모습입니다.

-> 대통령의 옷색깔에 대한 시비는 얼마든지 수긍가능한 부분. 교육부 장관이 사고 현장에서 컵라면을 먹을 수도 있음. 더 큰 문제는 사고에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되는 교육부 장관이 사진찍으러 갔다는 것과 라면먹던 자리는 구조자들 오면 치료하려고 준비해놓은 자리라는 것 등등이 국민적 감정을 상하게 한 부분. 이 부분도 넘어갈 수는 있음. 하지만 청와대 대변인은 곧 정부의 입인데 그 대변인의 발언은 비판받아 마땅함. 

지엽적 시비를 거는 것이 문제라면, 대체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여태까지 말해온 한국인 의식문제가 '억지 떼를 쓰는 유가족' 에게는 있고, 구조에 무능해서 애들을 죽인 정부에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단 말인가? 이 사고에서 문제의 본질이라면, 구조무능에 대한 총체적 분석을 해도 모자랄 판에, 왜 이 무능에 대한 비판적 사고와 목소리는 이렇게 한바닥의 글을 써서 비판해야할 대상이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발등의 불을 꺼야하는 다급한 시간에 총리 장관에게 사퇴하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의 한심함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사표를 내는 것 또한 딱하고 무책임합니다. 더욱이 이번 사건에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가라고 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비극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패를 갈라 반대자는 무조건 미워하고, 무슨 일만 생기만 사사건건 증폭시키는 사회는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어갑니다.

    

유가족도 예외가 아닙니다. 험난한 물길을 헤치고 목숨 걸고 구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왜 빨리 결과를 못 가져 오느냐고 절규했습니다. 가족들의 피 마르는 심정을 이해는 하지만 이 모습 또한 조급한 의식의 반영입니다.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은 슬픔을 참고 자식의 죽음 앞에 전율할 정도로 절제하는 모습을 대할 때 죽음은 더욱 숭고해지고 감동은 깊어집니다.

-> 조광동이라는 언론인의 수준. 물속에 자식들을 둔 부모심정을 전혀 이해 못함. 이것은 말그대로 절규이지, 조급증에 걸린 사람의 모습이 아님. 어느 부모가 이 상황에서 절제할 수 있으며, 또 절제해야 하는가? 애들의 죽음을 숭고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절제하라는 주장인데 미쳤다고 할 수 밖에.

    

현장에 간 총리에게 물을 끼얹고, 대통령에게 소리 지르고, 대통령 조화를 치우고, 구조 작업이 느리다고 청와대로 행진하자고 외치는 모습은 격이 떨어집니다. 유가족이라고 해서 무례해질 권리는 없습니다. 유가족들은 참변의 당사자들이기 때문에 감정을 절제하지 않아도 괜찮고, 잘못된 행동을 비판할 수 없다는 분위기는 잘못된 것입니다. 돌팔매질을 당할 잘못을 했으면 무자비하게 몰매를 맞고, 돌을 던질 수 있는 입장에 있을 때는 무절제하게 감정 표출을 하는 것 또한 고쳐야 할 한국인의 모습입니다.

-> 과한 감정표출, 욕설, 폭력은 당연히 비판받을 수 있음. 하지만, 유가족이 청와대로 가자고 하는 것은 화풀이를 하자는 목적이 아니었음. 현장에 있던 해경과 총리가 자기입으로 더 이상 해줄 수 있는게 없다, 사실 할 수 있는게 없다 라는 식으로 얘기하니, 국민적 관심을 끌고 청와대의 행정력을 동원해볼 의도가 담긴 퍼포먼스라는 걸 모르나. 그마저도 경찰병력으로 둘러싸서 차도 못타게 하고 길도 못 가게 막아놓는 것이 현 정부의 대응인데. 

그리고 청와대 앞에 가면 왜 안되는지? 미국에서는 백악관 앞에서 마음대로 시위하는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 정부는 5년 임기로 행정권을 부여받은 국민의 대리인일 뿐.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예를 갖추라는 것인가?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는 추모의 물결이 한국을 뒤덮고 있습니다.

슬픔의 눈물이 진정함이 되고, 애통하게 가버린 젊은 영혼들을 진정으로 기리는 길은 한국인 의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달라지는 첫 걸음은 자기 성찰입니다. 남의 탓으로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는 것을 멈추고, 격한 목소리를 낮추고 각자가 겸허한 성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곳곳에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질주하는 빨리 빨리 문화에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 자기 성찰은 알아서 잘 하고 있음. 오히려 비판 받아야 할 대상에 대해 더 처절하게 비판하고 도려내야할 적폐를 찾아내는게 이런 문제를 재발시키지 않을 방법임. 그런데, 지금 그런 비판의 목소리를 싸잡아서 거두고 자기 자리에 앉아서 도나 닦고 있으라는 이런 샌님같은 주장은 혼자하면 됨. 

    

무능한 수습과 더딘 구조를 비난하기에 앞서, 선장 선원들에게 돌을 던지기에 앞서, 나는 여기서 자유스러울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세월호 선장이나 선원이 되지 않을 수 있는지 정직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국가 위기가 도래했을 때 생명을 걸고 지키려는 헌신과 애국심이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라의 품격과 정부 수준은 국민 의식의 실상입니다

-> 자꾸 비판의식 vs 희생정신의 프레임을 가져대는데 전혀 근거가 없음. 실종자 가족들 돕고, 봉사하고, 물속에 들어간 바로 그 사람들이 정부를 비판했음. 

    

참사 재발을 막기 위해 안전 교육을 강화하고, 재해 예방 훈련을 하고, 정부 시스템을 효율화 시키고, 정부 기구의 부조리를 제거할 것을 강조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가장 본질적인 변화는 국민의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위로 부터만이 아니라 아래로 부터 의식 개혁 운동이 일어나고, 정부수술과 국가 개조가 실현되고, 국민의식 문화에 혁명적 변화가 오지 않으면 더 큰 세월호, 대한민국호의 침몰까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뼈를 깎는 성찰의 채찍으로 스스로를 개혁하고, 한국 사회에 혁명적 의식 변화의 강물이 오늘의 부조리를 씻어내지 않으면 오늘의 애도 눈물은 일시적 감정 배설로 끝나고 형식문화에 함몰되어 세월의 강물에 흘러 갈 것입니다. 세월은 슬픔과 아픔을 치유하는 약이지만, 과거를 기억하고 행동하지 않을 때 세월은 슬픔과 아픔을 되풀이하는 독이 됩니다. 

"빨리!빨리!"는 빨리 오지만 빨리 달아납니다. 빨리 빨리에는 모래성의 비극이 있습니다.  

-> 역시 미사여구를 동원한 같은 말의 반복들. 문제의 본질이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있다면, 그 근거를 댔어야 하는데, 이 손가락질이 향하는 곳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반정부적 비판여론에 향하고 있음. 

"대통령 욕하지 마라, 언론은 좀 점잖아라, 유가족도 숭고한 절제를 보여야지." 라는 말은 도대체 지금 누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일지 생각해보길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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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S를 사용해서 중앙정렬을 하려면 여러 팁들이 있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1. 고정된 width, height 값을 가지는 element 의 정렬. 
2. 가변폭을 가지는 element 의 정렬. 

1번의 경우는 아주 쉽습니다. 

.element{ 
  width: 100px; 
  height: 100px; 
  position: absolute; 
  left: 50%; 
  top: 50%; 
  margin-left: -50px; 
  margin-top: -50px; 


쉽게 이해되시죠? 
마이너스 마진값을 가지고, 결국 자신의 폭의 절반을 빼주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언제나 화면 중앙에 요소배치가 가능합니다. 

2번의 경우는 좀 더 복잡합니다. 마컵이 여러 단계로 필요한데요. 

<!-- HTML MARKUP --> 
<div class="to_this"> 
  <div> 
      <div> 
        <div class="align_me"></div> 
      </div> 
  </div> 
</div> 

무려 네 단계의 마컵을 거칩니다. 

CSS 를 less.css 기준으로 보여드리면 이렇습니다. (이해하기 쉬우시라고) 

.to_this{ 
  position:absolute; 
  top:0; left:0; bottom:0; right:0; 
  z-index:10; 
  >div{      
      display:table; 
      width:100%; 
      height:100%; 
      >div{ 
          display:table-cell; 
          vertical-align: middle;          
          .align_me{          
          padding:10px; 
          } 
      } 
  } 


1) 결국 window 를 기준하려면 기준점이 필요하기 때문에, div.to_this 가 절대포지셔닝으로 전체화면을 채웁니다. 
2) 그 바로밑의 div 는 table 역할을 해야하기 때문에 역시 전체화면을 꽉 채우는 table 로서의 역할 
3) 그 바로 아래가 table-cell 로서 중앙정렬자 역할을 해주고요. 
4) 마지막 div.align_me 가 가변폭을 가지는 그 무엇이 될 수 있습니다. 


쉽게말해, table / table-cell 관계를 가지고 중앙정렬을 하는 것인데, 늘 화면 중앙에 두기 위해서 여러 꼼수를 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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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누르는 부분이 길 필요는 없다. 재료를 아낀다는 데 의미가 있을까.

2014-01-01 11.5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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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디바 매장에 들렀다가 발견.
위에서 아래로 힘만 주면 윗쪽 부분이 트위스트되면서 포장을 닫는다.

2014-01-01 14.49.25

2014-01-01 14.4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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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헤어지는 것

생각 2014.01.15 11:43

살다보면 누군가와 헤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게 일터에서건 연인이건 투자자와의 만남이건 올 때가 있다. 그 순간이 왔을 때, 우리가 부디 잘 헤어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잘 헤어진다는 것이 뭐 여러 의미가 될 수도 있겠지만, 다시 봤을 때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게 불편하지 않을 정도면 좋을 것 같다.


부끄럽지만, 살다보니 세상 다시 안 만날 사람이란 게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심지어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도 하지 않던가. 다시 원수와 싸울 일이 생긴다는 게 아니라,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곳에서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그 때, 나는 부끄러웠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런 경험을 몇 번 하고나니, 누군가와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올때마다 참 많은 고민들이 생긴다. 이 사람과 나중에 다시만난다면, 그때 나는 어떤 얼굴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둘다 안 불편 하면 더 좋겠지만, 그게 안되면 나라도 불편하지 않도록, 적어도 나는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그를 보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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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ss-tricks.com/myth-busting-css-animations-vs-javascript/


나도 웹 애니메이션 쓸때, javascript 로 해야할지 css animation 으로 해야할지 고민 많이 하다가, 사용하기 쉽고 퍼포먼스도 좋다길래(자동으로 gpu 쓴다길래) css animation 을 썼다.


근데 모바일 기기에서 확인해보면 아무래도 버벅이는게, 이게 과연 gpu 를 썼다 할 수 있나 의심했더랬다.


오늘 알고보니, css animation 중에서 GPU 를 사용하는 것은 opacity 랑 transform 밖에 없다고 ㅠㅠ

height, width 뭐 이런거 animation 값으로 쓰면 이건 cpu 에서 처리한다. 당연 버벅일 수밖에.


transform 으로 애니메이션 모두 바꾸고 났더니 모바일에서도 아주 부드럽게 애니메이션된다.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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