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27 07.04.43

골프장에 갔더니, 식당에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내주면서 커피컵마다 서로 다른 색깔의 스티커를 붙여줌. 골프 치는 내내 마시는 것이다 보니 골프 카트에 나란히 싣고 다니는데, 아무런 표시가 없으면 대체 누구것인지 알수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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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 대한 두려움

생각 2012. 9. 18. 10:07

주말에 하린이를 혼낼 일이 있어서, 따끔하게 주의를 줬다.

목사님 말씀 중에 단상 앞을 왔다갔다 하면서 제멋대로 소리를 지르고 다니길래 몇 차례 주의를 줬는데 멈추질 않았다. 옆에 있던 삼촌이 조용히 불러 타이르는 것도 듣질 않고 구제불능이기에, 하는 수 없이 데리고 나갔다.


매를 때릴까 싶다가도, 워낙 매 앞에서는 또 경기를 하는 탓에 그저 위협으로나 들고 있을 뿐이고, 엄하게 말로만 타이르는데 (사실 때가 되면 때리는 것도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녀석이 '엄마 아빠 무서워~' 하면서 운다.


"그럼, 무서워야지! 내가 네 친구니? 아빠 엄마는, 하린이가 잘못하면 혼도 낼 수 있는거야!"


순간적으로 내입으로 한 말이지만, 사실 이건 오래 전에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이다. 언젠가 내가 '다른 집 친구들은 아버지가 친구처럼 대해준다던데, 아버지는 좀 안 그런거 같아요' 라고 말하자, 아버지가 그러셨다. '세상에 친구는 많다. 하지만 아버지는 하나뿐이잖니. 그러니 나는 친구같은 아버지는 되어줄 수 없구나.' 

이걸 곧이 곧대로 해석하면 아버지가 참 구식이구나... 싶지만. 지나서 생각해보면 굳이 그렇게 오해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친구처럼 살가운 아버지도 얼마든지 있을 수는 있지. 하지만, 친구라는 특수성에는 어느 누가 위계를 잡지도 훈계를 할 수도 없다는 일종의 사회적 계약이 있는 것이다. 아마 아버지는 이런 류의 계약 때문에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못하게 되는 것을 걱정하신 게 아닐까 싶다.


무섭다는 것. 우리는 왜 이것을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가? 아이가 부모를 두려워하는 것이 왜 잘못되었다고 말하는가? 무서운 것도 정도가 있는 것이고, 종류가 있는 것인데, 부모에 대한 모든 두려움과 경외감을 잘못된 것으로 치부한다면, 요즘같은 세상에 대체 애가 무서워 할게 뭐가 있나. 선생이 무섭길 하나, 목사님이 무섭기를 하나. 부모조차도 무서운 존재가 되지 못하면 애가 삐뚤어지는 건 불보듯 뻔한 게 아닌가. 나는 그런 관점에서 부모는 두려워 할만한 마지막 보루라도 되어야 아이의 인생을 바로잡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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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 책

생각 2012. 9. 12. 23:34

책은 많은데 읽고 싶은 책을 찾기가 어렵다.

서점엘 가도, 도서관에 가도. 이래저래 뒤적거리기만 할뿐,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시간은 한정되어있으니, 쓸데없는 활자들로 내 아까운 시간을 버리기도 싫고, 고심이다.


현혹적인 메세지들로 겉을 장식한 책들이 쉴새 없이 쏟아지는데, 그럴 수록 나는 고전에 좀 더 관심이 간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세월의 무게에도 여전히 읽혀지는 그런 책들. 그런 책들이야 말로, 몇 개월, 몇 년이면 스러져갈 책들에 비해 시간 투자가 별로 아깝지 않다.


솔로몬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해 아래 새 것은 없다고.

책도 그렇다. 오랜 세월 살아남은 지혜의 책 몇 권이면, 굳이 시절에 편승한 트랜디한 책이 없어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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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t

생각 2012. 9. 7. 13:20

회사 빌딩이 낡아서 그런거라고 생각했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면 엘레베이터가 아직 다 멈추지 않은 상태. 그러니까 내려가던 것은 아직 덜 내려왔고, 올라오던 것은 아직 덜 올라온 상태로 문이 열린다. 그 차이가 그리 심하지 않기 때문에 다들 큰 놀라움 없이 타고 내리지만, 대략 5~10cm 정도 높이가 안 맞은 채로 열려서 스르르 하고 제자리에 온다.


그런데 오늘 이 후져보이는(?) 엘레베이터의 개폐가 사용자에게 도움이 되는 나름의 힌트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가끔 엘레베이터를 잡으면 내려가려고 부른 엘레베이터가 여전히 다른 탑승자들 때문에 올라가야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문 열린 것만 보고 덥석 타고는 아차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바로 여기에서 저 개폐방식이 도움이 된다. 내가 불시에 맞딱 드리는 status 에 대해서 그 이전의 status 를 알아야 할 경우, 그에 대한 힌트가 보이는 것이 사용성에 있어서는 좋은데, 바로 이 덜 맞춰진 채로 문이 열린 엘레베이터가 그 힌트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방법 외에도 엘레베이터 표시등을 본다던지 하는 다른 방법이 많으나.

오늘 나는 휴대폰 쳐다보느라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서야 허둥댔고, 그 힌트 덕분에 엘레베이터에 잘못 타는 실수를 하지 않은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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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 라고 쓰고 '조리있는 말하기' 쯤으로 읽는다 - 가 안 되는 사람을 만날 때 제일 짜증이 난다.

본인 스스로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고 내뱉는 형용사와 조사들. 맞춤법 틀리는 건 아예 논외로 치고. 

그런 수식어들의 홍수 속에서 본인은 굉장히 멋진 말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고, 그걸 계속 듣고 넘겨야 하는 사람은 이걸 계속 받아쳐야 하는지, 아니면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 알기나 하고 쓰느냐고 반문해야 하는지 듣는 내내 괴롭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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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를 배우고 있다.

배우기 시작한 건 올 초였는데, 한달 강습을 받고는 창업한다고 바빠서 손 놓고 있다가, 지난 달에 다시 레슨을 시작했다. 서너달을 놨더니 거의 처음부터 다시 하는 기분이었고, 공도 거의 맞질 않았다. 초반 한 달에 투자한 돈과 시간이 아까웠다.


이번 한달은 아침 시간에 주로 강습을 받았다. 저녁때보다 출석하기도 쉬운 편이었고, 의지를 다지기에도 좋았다. 물론 후반으로 가서는 꾀가 나기도 하고 몸도 피곤해서 한 두번 포기하긴 했다. 그래도, 연습을 하고 새로 배우는 것들을 적용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개선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가 이루는 이 작은 성취에 감사했다. 


연습하고 노력해서 작은 성취를 이루는 이 경험. 이것이 우리 삶에서 자주 노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하고 있는 이 긴긴 작업들과 노력들에 대해 내 스스로 불신하고 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운동은 훌륭한 촉진제이며 스승이 된다. 나는 그것을 배웠다. 


또 하나의 유익은 '믿음' 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배우는 것이다. 

운동을 배우다 보면 내 상식과 맞지 않는 것들을 몸에 익혀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일전에 스노우 보드를 타면서도 이런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앞발에 무게를 싣는 것 따위다. 앞발에 무게를 실어야 뒷발로 방향 전환이 가능하고, 그래야 결국에는 속도도 조절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는 앞으로 무게를 실으면 가속이 될게 뻔하고, 속도가 붙는 건 초보자로서는 두려운 일이다. 그러니 이 상식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 위해, 나는 타는 내내 '앞발에 무게, 앞발에 무게' 라고 입으로 되뇌이면서 내 스스로를 통제했다. 이 믿음이 체화되면, 그제서야 나는 자유를 얻게 되는데, 운동은 이 작은 믿음이 내게 주는 변화를 체험케 하는데 아주 좋은 툴이다.

(골프도 클럽으로 공을 떠올리듯 치는 게 아니고, 거의 땅을 찍듯이 쳐야 하는데 여기에도 '믿음'이 필요하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디모데전서 4:8)


뱀발. 힐링캠프에서 차인표씨가 아주 중요한 얘기를 했는데 팔굽혀 펴기 1000개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늘려나가면 된다. 나는 그 방송을 보고나서 지금 83개의 팔굽혀 펴기를 하고 있다. 그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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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부터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했다. 

이것도 10년 전 얘기고, 그나마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 학교라 가능했지, 일반 대학 같았으면 나는 몇 번 휴학을 하고 일을 해가면서 학교를 다녔을 지도 모른다. 홈페이지를 만드는 일을 할 수 있어서, 그 벌이로 기성회비나 기숙사비 내고, 일이 괜찮을 때는 용돈도 부족하지 않게 쓰곤 했다. 과외는 거의 안 했으니, 고학생 치고는 그렇게 힘들 것도 없었다.


2학년이었는지 3학년이었는지 대략 여름이었는데. 어느날,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용돈 하라며 50만원을 보여주시겠다는 거였다. 돈 생긴다는데 누가 마다하겠냐마는. 내가 그 당시 딱히 돈이 부족한 상황도 아니었고, 아버지 어머니 어렵게 지내시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으니, 오히려 그 돈이 나보다는 부모님께 더 유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전 괜찮아요. 아버지 쓰세요."


딴에는 생각한다고 드린 말이었는데, 되려 그 말 때매 아버지께 많이 혼났다. 부모가 주는 건 그냥 감사하게 받는 거지, 자식이 뭘 받니 안 받니 하는 거 아니라고. 매점 앞에서 휴대폰을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부모가 줄 수 있을 때, 또 그것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제는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설령 내가 환갑이되고 아버지가 팔순이 넘어도, 아버지가 주시는 돈 만원을 내가 받을 수 있다면, 그게 내게도 아버지에게도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왜 나는 그때 깨닫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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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과 질타

생각 2012. 7. 17. 10:31

요즘 아침에 골프연습장에 나가서 레슨을 받고 있다.


오늘은 코치가 내 그립이 좋지 않다며 이래저래 싫은 소리를 하길래 기분이 좀 별로였다. 

사람이 간사해서, 조금만 잘한다 잘한다 하면 기운이 나서 붕붕 날다가도, '이게 좀 별로다. 이런 건 고쳐라' 하면 겉으로는 '네, 네' 하지만 속으로는 마뜩치 않아하는 것. 게다가 '이 코치가 지금 날 제대로 잘 가르치고 있는가?' 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무슨 지적을 해도 고깝게 들릴 수 있다보니. 나는 이 부분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과거에는 회사에서 내가 아랫사람이다보니 이런 칭찬과 질타를 듣는 입장이었고, 지금은 스타트업에 있으니 나에게 이렇다 저렇다 할 사람이 없다. 오히려 내가 다른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 때로 칭찬인지 질타인지를 돌아보게 되고, 또 내가 얼마나 누적해서 칭찬과 질타를 주었는가를 곰곰히 따져보곤 한다. 


아무리 상황이 맞고, 내가 옳아도. 여태 칭찬 한번 못 듣고 싫은 소리만 들어온 사람에게 또 한번의 질책은 별로 의미도 없고 감정만 상한다. 이럴 때,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잘 살펴서 말을 아끼는 지혜도 필요하다.


뱀발1) 골프코치가 좀 시원찮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라고 말하거나 (그럼 니가 설명을 못하는데 무슨 코치니), '아, 답답하네. 회원님! 이게 안돼요 이게?' (야, 내가 배우러 온 사람이니까 당연히 안 되지. 그게 됐음 내가 여기서 배우냐? 가르치지) 라고 말할 때.


밸발2) 이제,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은 사용자. 'UI 가 구리다' 라던지 '디자인이 맘에 안 든다' 라는 식의 피드백이 들어오면 그날 하루 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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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아무리 뒤져도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답을 주는 데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어느 쓰레드의 댓글 댓글에 겨우 적혀있는

‘시간대를 미국 시간대로 바꾸어 보세요’

덕분에 이 미궁에서 겨우 빠져나옴.

 

안드로이드 SDK 이거저거 다운 받을 때는 ‘미국 시간대’ 로 시스템 시간을 바꿔놓으면,

다운로드 하다가 멈춰버리는 현상이 잘 생기지 않습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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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4-072428

주문 받는 사람 머리 위에 달려있는 저 메뉴판들. 저거 손으로 돌리면 돌아간다.

맥도널드는 맥모닝 시간에는 맥모닝만 팔고, 그 시간 넘어가면 점심메뉴 팔고해서 제깍제깍 메뉴를 바꿔줘야 하는데, 그거 어떻게 하나 했더니 점원이 손을 뻗어 저 메뉴판을 휘리릭 돌리니 다른 메뉴가 튀어나옴.

즉, 저 메뉴 덩어리 하나에 3개 면을 쓸 수 있고 시간대 따라서 혹은 시기별로 필요한 메뉴로 손쉽게 갈아치울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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