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찾기

생각 2014. 11. 3. 07:13
오늘은 우리 부부가 교회학교 활동담당을 맡게 되었다. 주제가 있고, 그 주제에 대한 활동을 지도하는 식인데, 오늘 주제가 바로 '안식일' 이었다. '안식일' 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나는 곧바로 '주 5일제 근무' 라던가, 토요일을 안식일로 주장하는 것을 쟁점으로 하는 몇몇 이단들, 카톨릭 교회, 토요일이 맞는가 일요일이 맞는가 하는 논쟁 따위를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늘 언제나 답은 미완인 채로 여태 미뤄두었다. 신앙생활에 큰 지장을 주지 않기도 하거니와, 신학적으로도 아직 분분하다는 내용을 굳이 내가 뭐하러 덤빌 필요가 있나 싶어서였다.
허나, 어제 아내가 촉발한 문제제기 - 정말 문자적으로 마치 유대인들처럼 쉬는 것이 옳은가? - 덕분에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좀 더 명확해져야 할 필요를 느꼈다. 사실 아내의 문제제기는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의 판단 보다, 남편인 내가 주말이나 토요일에 나가서 활동하는 것을 꺼린다는 심증을 재차 확인해보고 싶은 데 있었다. 그러니, 나는 이 주제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여러모로 나의 신상에 좋은데, 첫째는 내 스스로가 행동의 근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 좋고, 둘째로는 이를 명확히 해 둠으로써 아내와의 기질적 차이 혹은 신념적 차이로 생기는 문제들을 새롭게 중재해볼 기회를 갖는 것이다.

우선 안식일에 대해 내가 지난 25년간 교회를 다니며 줏어들은 것들을 나열해보면 이렇다.
- 하나님은 창조하시면서 제 7일에 쉬셨다.
- 쉬신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안식일'을 창조 하셨다. 쉰다는 개념 자체도 만들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 엿새를 힘써 일하라는 말씀이 있다.
-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이 십계명 중에 하나 있다.
-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금요일 부활하신 요일은 일요일이다.
- 창조 첫날은 '빛'의 창조이다. 
- 일요일은 한 주의 첫 날이다. 주말이 아니다.
- 유대인들이 안식하는 날은 토요일이다. (금요일 밤부터 쉬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식일에" 로 검색한 성경 말씀
- 누가복음 13: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 누가복음 4:31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  이사야 58: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 이사야 66:23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
- 사도행전 13: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 분명히 있다. 쉴라면 쉬고, 일하려면 일해라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준엄하게 '쉬어라' 라고 명령된 것이므로 지켜야할 필요가 반드시 있다는 뜻이다. 둘째로는 개인의 오락을 구하는 것을 삼가는 수준의 '거룩'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사야 58장 13절 말씀을 보면,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이라고 되어있다. 이래서 예전 목사님들은 주일에 시험공부도 하지 말고, 영화관도 가지 말라고 하신 거다. 

안식일에 무엇을 하면 되나?

성경 말씀을 살펴보니 안식일에는 예수님조차도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으로 되어있다. 아무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빈둥 집에만 있자니 그것도 참 무료한 편이고, 게다가 하나님이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고 예배하라고까지 하셨으니 (66장 23절) 예배와 안식일은 아무래도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안식일에 모여서 성경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서로 이야기하는 것 정도가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모습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안식일에 예배하는 것은 맞는 것 같은데, 예배한다고 안식일이 되는 것은 아니기때문에 이것은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일요일이 왜 한 주의 첫날인가?

이 부분은 성경에서 정해놓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기원을 찾아보니, 주로 로마시대에 달력을 재정하면서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일요일이 첫날인 것은 맞는데, 그 날을 휴일삼고 예배하도록 하는 것이 로마의 칙령으로 만들어지고 이후 계속된 것이다. 사실상 그전까지는 기독교인들은 제 7일인 토요일에 안식하고 예배까지 하던 것을 이제 반강제로 일요일에 예배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일요일은 부활절과도 겹치므로, 부활축제의 개념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활절 축제 - 예배"를 매주 반복한다고 보면 비슷할 듯. 

그럼 뭐가 맞는거야?

1. 예수님 시대까지는 안식일 = 토요일 = 예배 세트가 작동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게 레퍼런스로 확실한 듯 함.
2. 로마시대에 달력 만들면서 예배를 일요일로 강제 쉬프트 작동했고, 부활절 = 예배 세트가 더 강해진 듯. 안식일 = 토요일 고리는 남아있지만 예배만 일요일로 쉬프트. 물론 로마에서는 일요일을 휴일로 공표했고. 안식일, 일요일 이렇게 이틀이나 쉰건가?
3. 엿새 일하라는 건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 건가? 원래대로라면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엿새동안 힘써 일하고, 토요일에 쉬면 된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이 안식일이 일요일로 강제 이동해버렸기 때문에,
1)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를 엿새로 보고, 일요일에 쉬는 방법.
2) 일요일에서 금요일까지를 엿새로 보고, 토요일에 쉬는 방법.
이 두가지가 존재하게 된다.
문제는 지금 일요일에 이미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안식일'에 드리는 예배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부활축일' 로서의 예배로 보아야 하는가의 입장이다. 
사실상 안식일로서의 예배로 보아야 하는 것이, 부활축일은 매주 반복되는 개념으로 보기 어려우니 안식+예배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면 본래와는 맞지 않지만, 어쨌든 일요일이 현재로선 휴일로 재정되어 있으므로, 이 날을 안식일로 '활용'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미 달력을 만들면서 날짜와 요일들도 몇번씩 이동했기 때문에, 지금으로선 누구도 제대로 된 토요일이 언제인지 일요일이 언제인지 장담할 사람이 없다. '일곱번째 날' 과 같은 서수형태의 표현으로도 미루어 볼 수 있듯이 이건 반복이 중요한거지, 2014년 11월 2일이 정말 일요일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다. 
이렇게되면 1번: 월~토 를 힘써 일해야 할 '엿새' 로 보는 것이 맞게 된다.
그렇다고 주 5일제를 반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언젠가 보니, 이런 근거로 주 5일제를 반대하고 엿새를 일해야 옳다고 하시는 분 계시던데, 사람이 꼭 회사 나가서 출근하는 것만 일이 아니다. 나는 이로 인해, 토요일을 가장으로서 확실하게 '근무' 해야하는 근거가 생겨버렸다.

일요일에 쉬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현대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또 하나의 쟁점은 이것이다. 일요일에, 우리는 쉬는가? 
많은 크리스천들은 예배한다. 그리고 쉰다. 하지만, 예배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크리스찬들은 일요일에 쉼보다는 노동에 가까운 활동들을 하게 마련이다. 예배를 준비하고, 성도들의 식사를 마련하고, 차량봉사를 하기도 하고, 주보를 만들고 문자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쉬어야 한다. 그래야 이 모순에서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모든 건 언제 다 하나? 토요일에 하면 된다. 토요일은 아직 쉬는 날이 아닌 '주말' 이다. 우리가 예배하고 안식해야할 '일요일' 에 대비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노동. 그 노동을 위한 날로 토요일이 적격이다. 
그리고 정말 주일은 쉬어야 한다. 몸과 마음이 모두 쉬어야 한다. '보시기 좋았더라' 라고 하셨던 창조의 기쁨과 함께 쉬셨던 그 안식일. 우리도 몸이 쉬며 마음은 하나님의 창조의 기쁨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예배를 만들어야 하겠다. 


AND

여기 온지 한달이 조금 넘어간다. 낯선 풍경들은 조금씩 익숙한 것이 되어가고, 낯선 표정들도 하나둘 한국의 그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여전히 낯선 것들이 있는데, 이곳의 관습과 제도 같은 것들이 그렇다. 시간이 좀 걸린다.


여전히 답답한 것중의 하나는 식당에서 종업원을 부르는 일이다. 정확하게는 종업원을 부른다고 할 수가 없는게, 종업원을 부르는 법이 없다. 그냥 손님은 앉아서 기다리고, 종업원이 찾아와서 묻는다. 그러기 전까지는 결코 그들을 불러내는 법이 없다. 나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데, 여기 친구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하다. 


음식을 주문할 때는 물론이며, 계산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밥을 다 먹었는데도, 하염없이 기다린다. 나같으면 빨리 불러서 돈 쥐어주고 떠나는 게 더 맞지 싶은데도, 세월아 네월아 하고 기다린다. 답답해 죽겠어서 내가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 라고 묻는데도, 아니란다. 그냥 기다리면 된댄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것이 서비스직을 대하는 그들의 전반적인 태도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거 아니었나? 라는 생각을 또 해보기도 한다. 우리는 식당엘 가면 종업원을 마치 자기 집 종 부리듯 막대하는 경향이 있다. 반말을 쓰는 사람도 더러 있고, 서비스가 좀 맘에 들지 않으면 호통을 친다거나, 머리카락이라도 나오면 아주 뒤집어지는 사람들. 우리는 서비스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받을 때, 그들의 인격까지도 돈을 주고 샀다고 생각하는지, 하대하는 것을 쉽게 생각한다. 손님만 그렇게 생각하면 모르겠는데, 사업주들도 마인드는 거기서 거기다. '서비스정신'이라는 미명하에 손님 옆에 무릎을 꿇려서 주문을 받거나, 말도 안 되는 '음식 나오셨습니다' 따위를 말하게 하는 것들. 이게 정말 서비스 정신인가? 


하지만 그들 역시도 직업인이고, 전문가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그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온전히 존중한다면, 이들의 행동 역시 조금은 이해가 간다. 종업원들도 제나름 열심히 일하고 있고, 손님을 찾아다니며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데 내가 굳이 불러 세울 것이 무언가? 그들의 전문적인 영역을 굳이 내가 끼어들어서까지 지적해야하는가? 여기 내가 있으니까 좀 봐달라고? 서빙하는 사람이 그 정도 눈치 없을까봐서? 이들은 이들의 전문영역을 터치하지 않는 것이다. 기다리면 알아서 올 것이라는 믿음은 거기에서 출발한다고 봐야한다.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속터지게 기다리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이것을 하나의 극단으로 본다면, 다른 극단에 있는 우리로서는 충분히 이동할 여지가 있어보인다. 빨리 빨리 테이블 회전을 시켜야하는 사장님의 조급함만 없다면.

AND

공놀이

생각 2014. 6. 18. 20:09
#diary

둘째 녀석은 공놀이에 아주 환장을 한다. 꼭 공이 아니어도, 둥글어서 굴러만 가는게 있으면, 아 눈이 두 배는 커진다. 아직 말을 잘 못해서 '꼬옹~!' 이란 말을 힘주어 내뱉기도 하고, 애 엄마가 처음에 ball 이라고 가르쳐놓은 것이 있어서 여차하면 '뽀올~!' 하는 말도 한다. (더군다나 그런 동그란 것이 하나도 아닌 네 개나 달려있는 자동차는 두말할 것도 없다.)

아무튼, 공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이 조그마한 녀석 때문에 우리집이 온통 공 천지다. 아직 축구공이나 농구공 같은 것을 다루기엔 너무 어리다보니, 장난감 공으로 줄 수 있는 것들이 탱탱볼이나, 말랑말랑한 헝겊공, 혹은 구멍이 숭숭 뚤려서 외곽으로만 뻐대가 있는 공 같은 것들이다. 아무리 던져도 혹은 맞아도 그리 아프거나 다치기가 어렵다. 덕분에 집안에서 아들녀석과 놀아주는데 이런 공놀이만큼 좋은 게 없다.

이렇게 공에 집착하는 아들녀석과 달리, 사실 나는 공이라는 물건에 대한 별다른 추억이 없다. '공'을 돈주고 사본 것은 아마 초등학교때 방영했던 '피구왕 통키' 라는 만화 덕에 하나 들여놓은 형광색 피구공이 전부였던 거 같고, 농구나 축구에는 전혀 조예가 없었으므로 그런 것들 역시 돈주고 집에 들여놓은 역사가 없다. 사지 않았던 것은 돈이 궁해서라기보단, 내가 흥미가 없었기 때문인데, 하여간 둥근 것과 몸이 직접 닿는 거의 모든 종류의 스포츠에 나는 참 약했다. 농구도, 축구도 그 나이 또래 애들이라면 누구나 열광했을 법한 스포츠였는데, 나의 유년기 그리고 청소년기에는 이런 '공'과의 애틋한 추억이랄 게 딱히 없는 것이다. 

그랬던 내가, 요즘은 공놀이에 제법 취미가 붙었다.
여전히 축구공이나 농구공은 없지만, 아들녀석이랑 놀면서 맛들인 자그마한 탱탱볼의 묘미에 빠져서 온갖 현란한 발동작으로 공을 갖고 노는 것이다. 공이 약하고 말랑 말랑하다보니, 나처럼 공을 잘 못다루는 사람도 앤간한 발동작으로 이런저런 '볼컨트롤'이 가능하다. 공중에 서너번은 제기차듯 차올릴 수 있고, 당구에서 빨아치듯이 되돌아오게 볼을 굴려보기도 하고, 내가 원하는 높이로 과녁을 맞추듯이 발로 탁탁 차올리는 것도 가능하다. 애는 되려 공놀이를 못하고 있는데, 내가 더 열심인 날도 많다. 삼십년을 외면했던 공과 다시 마주하니 반가워서 이러나?

불현듯 스쳐가는 공과의 미약한 추억이 하나 있긴 하다. 중학교 시절, 점심시간마다 나가서 남들 다하는 축구를 놔두고 나와 단짝 둘이서 '족구'를 했던 기억이 있다. 네트가 있기를 하나, 뭐 족구장이 있을리 만무하고. 그저 운동장에 금 하나 그어 놓으면 시작할 수 있어서 편리한 맛에 나와 단짝 둘이서만 주고 받고 하며 점심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툭 툭 신선놀음하듯 차고 있으면, 시간도 잘 가고. 어디 멀리까지 분주하게 다닐 필요가 없어서 내 성격에는 잘 맞았던 거 같다. 내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나름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축구좀 하는 친구들이 가끔 와서 같이 차면, 족구를 몇달 찬 나보다도 훨씬 현란한 공놀림으로 나를 풀이 죽게 만들곤 했다. 이러니, 미약한 추억도 그저 쓸쓸하게 기억될 뿐이리라.

그 쓸쓸함에 대한 보상심리일까. 오늘도 아들과 좁아터진 집안에서 차고노는 이 앙증맞은 탱탱볼. 아무도 뭐라 하는 이 없고, 내가 그저 즐거워서 차고 노는 이 둥근 물건 덕에 나는 일상의 소소한 재미를 선물받았다. 모르지. 나도 이 참에 공놀이에 재미좀 붙여서 나중에 대통령 선거 나갈 나이쯤 되면, 피파 위원 하셨다는 어느분처럼 동네 아저씨들이랑 조기축구 하고 있을런지.



AND

세월호 참사가 한국을 뒤 흔들고 있습니다.

그 많은 어린 넋들이 꽃을 피우기도 전에 어른들의 잘못으로 바다에 묻히는 것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선장과 선원들이 먼저 빠져 나오지 않고 제대로 대처만 했어도 구할 수 있었기에 더욱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관료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관계자들이 제대로 훈련이 되었으면 정부가 이렇게 허둥대질 않았을 것이기에 고통은 무력감으로 변합니다. 

-> 관료주의, 무능한 구조, 시스템에 대해 우선 한번 짚음. 그러나 이 문단을 집어넣는 이유는 이 전체 글에서 이 부분에 대해 비판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초두에 넣는 것. "이 부분에 대해서 나도 비판한다" 그러나... 로 이어가기 위함.


그러나 참사 뒤 여기에 대처하고 반응하는 정부와 국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세월호의 본질적인 문제점이 선장이나 선원, 선주에게만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월호는 한국 사회의 총체적 부조리와 문제점을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 글의 핵심 문장. 이 사건의 본질적 문제는 한국 사회 총체적 부조리라는 주장.

    

마지막 선객이 구조될 때까지 배를 지켜야 하는 명예와 책임을 팽개친 선장이나, 선객들을 남겨두고 도망쳐 나온 선원들은 큰 벌을 받아야 하지만, 온 국민들의 격한 소리가 어쩐지 공허하게 들립니다. 손가락질하는 한국인들의 욕설이 과격해지고, 유가족들의 분노가 격앙될수록, 참사를 정치적으로 계산하는 정치꾼들의 꼼수가 두드러질수록, 그리고 이것을 확대 재생산하는 언론의 북소리가 커질수록 이러한 느낌은 깊어집니다. 여기에 모두 한국의 자화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 한국 사회의 총체적 부조리의 단면으로 1) 욕하는 한국사람들 2) 정치꾼 꼼수 3) 확대 재생산하는 언론 을 꼽고 있음. 어째서 총체적 부조리의 단면이 1) 재난 대처능력이 없는 정부 2) 구조보다 의전에 신경쓰는 관료들 3) 비판하는 목소리조차 억압하는 공권력 같은 것들이 될 수는 없는지? '한국사회의 의식문제' 라는 커다란 프레임으로 결국 반정부적 목소리를 폄하하려는 의도가 있는 글임. 


세월호 참사는 독립된 사건, 우연한 참사가 아니라 한국 사회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습니다. 세월호는 한국인의 정신과 의식 문화가 반영된 한국 의식 문화의 자화상입니다. 선장 선원이 도망쳐 나온 것을 거품 물고 욕하지만, 한국 사회에는 선장 선원과 비슷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다수 국민들의 잠재의식 속에 선장과 선원들이 있을겁니다. 선장 선원이 어쩌다 돌출한 별종의 사람들이 아니라,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의식 문화의 산물일 것입니다. 

-> 선장 개인의 범죄가 아닌, 한국인의 의식문화가 빚어낸 참극. 그렇다면 한국인의 의식문화중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를 생각하게 됨.


미국 군대에 갔다 온 어느 한인 젊은이의 이야기입니다. 미국 교관이 신병들을 훈련시키면서 "빨리!빨리!" 라고 계속 고함을 쳤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이 젊은이는 자기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미국 군대에서 미국인 신병을 교육시키는 미국 교관이 "Hurry! Hurry"대신에 "빨리!빨리!"라고 외쳤으니 말입니다. 미국 젊은이들은 빨리, 빨리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지만 몸을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 차렸다고 합니다. 이 미국 교관이 어떻게 "빨리,빨리"를 소리치게 됐는지 모르지만

,모르기는 몰라도 이 교관은 주한 미군 출신일 것입니다. 한국에 있으면서 한국의 성급한 문화,빨리 빨리 문화를 목격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사례는 코리안 아메리칸 직장에서 일한 타인종에게도 많습니다. 미국의 한인 세탁소나 식당에서 일한 히스패닉들은 제가 코리안줄 알면, 많은 경우 "빨리 빨리"라고 말하면서 한국어 실력을 자랑합니다.

    

한국인 의식 속에는 절제하는 브레이크 보다는 속도를 내는 엑셀레이터가 지배적입니다. 빨리 빨리 성공해야 하고,빨리 돈 벌어야 하는 조급함과 각박함이 본능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빨리 빨리 문화는 한국이 선진국으로 부상하는데 원동력이 되었지만, 균형과 절제력을 잃으면서 한국을 침식시키는 부식제가 되고 있습니다.

-> 쉽게말해 '빨리 빨리' 문화. 속도와 경쟁의 문화가 문제라는 얘기. 이에 대한 문제의식에는 공감할 수 있음. 그렇다면 속도와 경쟁문화가 어떻게 세월호 참사를 빚어냈는가에 대한 전개가 필요.


50세가 되면 은퇴를 걱정해야하고,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 남아야하고,돈과 권력의 줄이 있어야 사람 대접을 받는 사회에서,너그럽고 여유 있는 인간의 삶이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자기보다 못한 친구를 왕따 시키고 폭력까지 행사하는 학생들이 늘어가고, 스승이 제자를 꾸짖을 수 없는 교육으로 전락하고, 속이고 모함하는 일이 일상에 자리잡고, 부모도 재산이 없으면 푸대접 받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사회에서 품위 있는 삶과 인격을 유지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 이 문장까지는 위에서 이어져오는 맥락에 부합함. 

의견이 다르면 집단적으로 언어 폭력을 하고, 자기 주장을 위해 상대를 인격 살인을 하는 집단 떼 문화, 억지 떼 문화의 광기 사회에서 합리성과 균형감각이 설자리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밟고 누르고라도 올라서지 않으면 내가 도태되는 사회 풍조에서, 나라에 충성하고,인간과 사회에 헌신하고, 시대적 사명에 열정을 바쳐야 한다는 가르침은 빛바랜 깃발이 되고 있습니다. -> 억지 떼문화, 광기의 발현이 바로 빨리빨리 문화와 경쟁사회에서 촉발되었다고 주장하는 것. 그러면서 그 때문에 빛바래는 가치로 충성이나 헌신을 들고 있음. 이 글에서 아주 치명적인 논리비약 중의 하나이면서 저자의 의도가 드러나 있음. 

첫째, '나라에 충성하고', '인간과 사회에 헌신' 하고, '시대적 사명에 열정을 바치자' 라는 가르침은 어떻게 억지 떼문화로 인해 그 가치가 낮아질 수 있나? 연결고리가 없음. 하지만 아래 문단들을 읽어보면 결국 이 문장의 주장은 '구조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는 정부와 잠수사, 해경에게 유족과 정치꾼들은 잘못된 한국인의 자의식의 발로로 비난을 위한 비난을 일삼는다는' 주장. 

둘째, 결국 이 문장을 다시 풀이하면 세월호 사고의 원인보다 사고 이후의 국민여론에 대한 비판이 목적임. 즉, "'속도와 경쟁문화' 가 세월호 참사를 빚었다" 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가 아님. 

   

이런 의식문화와 가치관에서 아름다운 인성이 형성되고, 나를 희생해서 남을 구하는 숭고한 인간 정신이 자라기 힘듭니다. 교육이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지식 로버트를 생산하는 입시 위주의 기능주의가 되는 풍조에서 세월호 선장과 선원이 대량 생산될 수 밖에 없습니다.

->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은 것이 입시위주, 속도경쟁문화 때문이라는 주장. 선원이나 선장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당연. 하지만 바로 윗문단에서 언급한 '억지 떼문화, 광기의 발현' 등등이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 모습과는 연결되지 않음. 

    

화물을 너무 적재한 것만 제대로 점검했더라도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하지만, 법과 규정을 안 지키는 것이 어디 세월호 뿐이겠습니까. 왜 해양 마피아를 척결하지 못했고, 왜 외화를 빼돌린 선주를 그냥 두었고, 왜 공무원들이 우왕좌왕 무능하고, 왜 재해 예방 안전 훈련을 하지 않았느냐고 질타하지만, 이것이 어디 세월호에만 있습니까. 한국 사회 곳곳에 부정부패가 켭켭이 쌓이고, 무사안일, 적당주의, 형식주의가 적폐된 사회에서 또 다른 세월호가 시한폭탄처럼 기다리고 있습니다.

-> 얼마든지 공감 가능한 일반적인 내용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이 파란색 옷을 입었다고 시비를 거는 시민이나, 교육부 장관이 사고 현장에서 컵라면 먹는 것을 문제삼은 기자 수준이나, "계란도 넣지 않았는데…"하고 대답한 청와대 대변인의 논평을 인터넷 신문 1면 톱으로 선동하는 명색이 주류언론의 수준 또한 한국의 자화상입니다. 이성과 합리성이 실종되고 감정과 억지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본질을 벗어나 지엽적 시비를 거는 것 또한 한국 의식의 모습입니다.

-> 대통령의 옷색깔에 대한 시비는 얼마든지 수긍가능한 부분. 교육부 장관이 사고 현장에서 컵라면을 먹을 수도 있음. 더 큰 문제는 사고에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되는 교육부 장관이 사진찍으러 갔다는 것과 라면먹던 자리는 구조자들 오면 치료하려고 준비해놓은 자리라는 것 등등이 국민적 감정을 상하게 한 부분. 이 부분도 넘어갈 수는 있음. 하지만 청와대 대변인은 곧 정부의 입인데 그 대변인의 발언은 비판받아 마땅함. 

지엽적 시비를 거는 것이 문제라면, 대체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여태까지 말해온 한국인 의식문제가 '억지 떼를 쓰는 유가족' 에게는 있고, 구조에 무능해서 애들을 죽인 정부에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단 말인가? 이 사고에서 문제의 본질이라면, 구조무능에 대한 총체적 분석을 해도 모자랄 판에, 왜 이 무능에 대한 비판적 사고와 목소리는 이렇게 한바닥의 글을 써서 비판해야할 대상이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발등의 불을 꺼야하는 다급한 시간에 총리 장관에게 사퇴하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의 한심함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사표를 내는 것 또한 딱하고 무책임합니다. 더욱이 이번 사건에 책임을 지고 대통령이 물러가라고 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비극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패를 갈라 반대자는 무조건 미워하고, 무슨 일만 생기만 사사건건 증폭시키는 사회는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어갑니다.

    

유가족도 예외가 아닙니다. 험난한 물길을 헤치고 목숨 걸고 구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왜 빨리 결과를 못 가져 오느냐고 절규했습니다. 가족들의 피 마르는 심정을 이해는 하지만 이 모습 또한 조급한 의식의 반영입니다.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은 슬픔을 참고 자식의 죽음 앞에 전율할 정도로 절제하는 모습을 대할 때 죽음은 더욱 숭고해지고 감동은 깊어집니다.

-> 조광동이라는 언론인의 수준. 물속에 자식들을 둔 부모심정을 전혀 이해 못함. 이것은 말그대로 절규이지, 조급증에 걸린 사람의 모습이 아님. 어느 부모가 이 상황에서 절제할 수 있으며, 또 절제해야 하는가? 애들의 죽음을 숭고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절제하라는 주장인데 미쳤다고 할 수 밖에.

    

현장에 간 총리에게 물을 끼얹고, 대통령에게 소리 지르고, 대통령 조화를 치우고, 구조 작업이 느리다고 청와대로 행진하자고 외치는 모습은 격이 떨어집니다. 유가족이라고 해서 무례해질 권리는 없습니다. 유가족들은 참변의 당사자들이기 때문에 감정을 절제하지 않아도 괜찮고, 잘못된 행동을 비판할 수 없다는 분위기는 잘못된 것입니다. 돌팔매질을 당할 잘못을 했으면 무자비하게 몰매를 맞고, 돌을 던질 수 있는 입장에 있을 때는 무절제하게 감정 표출을 하는 것 또한 고쳐야 할 한국인의 모습입니다.

-> 과한 감정표출, 욕설, 폭력은 당연히 비판받을 수 있음. 하지만, 유가족이 청와대로 가자고 하는 것은 화풀이를 하자는 목적이 아니었음. 현장에 있던 해경과 총리가 자기입으로 더 이상 해줄 수 있는게 없다, 사실 할 수 있는게 없다 라는 식으로 얘기하니, 국민적 관심을 끌고 청와대의 행정력을 동원해볼 의도가 담긴 퍼포먼스라는 걸 모르나. 그마저도 경찰병력으로 둘러싸서 차도 못타게 하고 길도 못 가게 막아놓는 것이 현 정부의 대응인데. 

그리고 청와대 앞에 가면 왜 안되는지? 미국에서는 백악관 앞에서 마음대로 시위하는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 정부는 5년 임기로 행정권을 부여받은 국민의 대리인일 뿐.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예를 갖추라는 것인가?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는 추모의 물결이 한국을 뒤덮고 있습니다.

슬픔의 눈물이 진정함이 되고, 애통하게 가버린 젊은 영혼들을 진정으로 기리는 길은 한국인 의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달라지는 첫 걸음은 자기 성찰입니다. 남의 탓으로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는 것을 멈추고, 격한 목소리를 낮추고 각자가 겸허한 성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곳곳에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질주하는 빨리 빨리 문화에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 자기 성찰은 알아서 잘 하고 있음. 오히려 비판 받아야 할 대상에 대해 더 처절하게 비판하고 도려내야할 적폐를 찾아내는게 이런 문제를 재발시키지 않을 방법임. 그런데, 지금 그런 비판의 목소리를 싸잡아서 거두고 자기 자리에 앉아서 도나 닦고 있으라는 이런 샌님같은 주장은 혼자하면 됨. 

    

무능한 수습과 더딘 구조를 비난하기에 앞서, 선장 선원들에게 돌을 던지기에 앞서, 나는 여기서 자유스러울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세월호 선장이나 선원이 되지 않을 수 있는지 정직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국가 위기가 도래했을 때 생명을 걸고 지키려는 헌신과 애국심이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라의 품격과 정부 수준은 국민 의식의 실상입니다

-> 자꾸 비판의식 vs 희생정신의 프레임을 가져대는데 전혀 근거가 없음. 실종자 가족들 돕고, 봉사하고, 물속에 들어간 바로 그 사람들이 정부를 비판했음. 

    

참사 재발을 막기 위해 안전 교육을 강화하고, 재해 예방 훈련을 하고, 정부 시스템을 효율화 시키고, 정부 기구의 부조리를 제거할 것을 강조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가장 본질적인 변화는 국민의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위로 부터만이 아니라 아래로 부터 의식 개혁 운동이 일어나고, 정부수술과 국가 개조가 실현되고, 국민의식 문화에 혁명적 변화가 오지 않으면 더 큰 세월호, 대한민국호의 침몰까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뼈를 깎는 성찰의 채찍으로 스스로를 개혁하고, 한국 사회에 혁명적 의식 변화의 강물이 오늘의 부조리를 씻어내지 않으면 오늘의 애도 눈물은 일시적 감정 배설로 끝나고 형식문화에 함몰되어 세월의 강물에 흘러 갈 것입니다. 세월은 슬픔과 아픔을 치유하는 약이지만, 과거를 기억하고 행동하지 않을 때 세월은 슬픔과 아픔을 되풀이하는 독이 됩니다. 

"빨리!빨리!"는 빨리 오지만 빨리 달아납니다. 빨리 빨리에는 모래성의 비극이 있습니다.  

-> 역시 미사여구를 동원한 같은 말의 반복들. 문제의 본질이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있다면, 그 근거를 댔어야 하는데, 이 손가락질이 향하는 곳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반정부적 비판여론에 향하고 있음. 

"대통령 욕하지 마라, 언론은 좀 점잖아라, 유가족도 숭고한 절제를 보여야지." 라는 말은 도대체 지금 누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일지 생각해보길 바람.

 






AND

잘 헤어지는 것

생각 2014. 1. 15. 11:43

살다보면 누군가와 헤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게 일터에서건 연인이건 투자자와의 만남이건 올 때가 있다. 그 순간이 왔을 때, 우리가 부디 잘 헤어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잘 헤어진다는 것이 뭐 여러 의미가 될 수도 있겠지만, 다시 봤을 때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게 불편하지 않을 정도면 좋을 것 같다.


부끄럽지만, 살다보니 세상 다시 안 만날 사람이란 게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심지어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도 하지 않던가. 다시 원수와 싸울 일이 생긴다는 게 아니라,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곳에서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그 때, 나는 부끄러웠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런 경험을 몇 번 하고나니, 누군가와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올때마다 참 많은 고민들이 생긴다. 이 사람과 나중에 다시만난다면, 그때 나는 어떤 얼굴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둘다 안 불편 하면 더 좋겠지만, 그게 안되면 나라도 불편하지 않도록, 적어도 나는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그를 보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 말이다. 

AND

음식을 먹는 기준

생각 2013. 9. 25. 12:47

추석 사흘동안 처가에서 음식 먹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먹는 양도 문화의 차이일까, 아니면 그저 생활수준의 차이일까?


내가 어릴 적엔 우리집 식탁에 생선이 두 마리가 한꺼번에 올라오는 일은 잘 없었다. 갈치는 한 마리가 여러토막으로 나오니 두 마리 효과를 누리는 건 있어도, 조기나 고등어 같은 생선이 두 마리씩 올라오진 않았다. 반면, 처가 식탁에는 늘 생선은 두 마리 정도가 올라온다. 

또 우리집에선 찌개나 탕이 있으면 그걸로 한끼 식사에 충분한 메인음식이었다. 하지만, 처가에서는 찌개나 탕이 있어도 불고기나 갈비가 나오기도 하고, 혹은 또 뭔가 있기도 하고 그렇다. 기본적으로 먹을 수 있는 게 많다.


결혼 초에는 이게 잘 납득이 안 가서 낭비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실제로도 두 사람이 주로 먹는 식탁에선 이 정도의 음식은 곧잘 남아서 낭비다. 하지만 아내가 지내온 문화권에서는 그렇게 식탁을 준비하고 음식을 소비했으니 그걸 탓하기가 어렵다. 기본적으로 식구 수가 우리집보다 많았고, 또 어느정도 여유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내가 크면서 음식을 많이 못 먹은 걸까? 그런 생각도 든다. 형편이 안 돼서 그렇게 푸짐한 상을 자주 못 먹은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느집 식탁을 스탠다드라고 들이댈 수 있겠냐만, 만약 처가기준으로 본다면 우리집 식탁은 다소 빈약한 데가 있었을게다. 난 그런 식탁으로 십수년을 커왔고.


처가에서 사흘을 먹고는 늘 배가 더부룩하고 과식한 느낌이었다. 몸에 안 익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푸짐한 상차림에 내가 눈이 멀어 과식을 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런 저런 생각에 배는 불러도 마음은 어느 한구석 쓸쓸한 데가 있었다. 

AND

엊그제 우리집에 오기로 한 분은, 결국 중학생 딸의 만류를 이기지 못하고 첫출근을 접어야 했다. 그 전에 일하시던 분도, 가족에게 숨기고 제법 오래 일을 하셨지만, 결국 아들이 만류하는 것을 이기지 못하고 일을 그만두셨다. 대체 ‘남의 집 일을 한다는 것’ 이 무어길래. 이토록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을 꺼리고, 더러는 자기 스스로도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불편해 할까.

하인, 식모, 파출부, 가사도우미 등등으로 이름의 명칭이 바뀌었을 뿐, 그 일의 성격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마도 큰 원인이지 싶다.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그 성격이 바뀌어서 이름도 바뀐 것이라 믿는 나는 사회적 통념을 너무 무시하는 건가. 우리집에서 청소나 아이돌보는 일을 도와주시던 이모님께 난 단 한번도 어떤 일을 마구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보지 않았고, 계약된 일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은 해서도 안 되고, 혹여나 해야한다면 양해를 구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대개는 우리보다 나이가 더 있으신 분들이 일하시기 때문에라도, 항상 일해주심에 감사드리고, 인사도 열심히 하고 그랬는데, 여전히 은연중에 주종관계에 대한 인식이 이런 일을 불편하게 만든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본인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고, 자녀들이 그러할 수도 있고. 허나 이건 본인 스스로가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문제다.

또 하나는, 이 일에 아무런 전문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편견이다. 집안일 거들어 주는게 뭐 대단하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그저 단순 노동력을 빌려주는 정도라고 믿는 거 같다. 허나, 설거지 하나를 하는데 있어서도 
- 물과 시간을 얼마나 절약해서 설거지를 마칠 것인지
- 어떤 순서로 설거지를 해야 효율이 높은지
- 물기가 잘 빠지게 하려면 어떻게 그릇을 쌓아올려야 하는지
- 수세미의 종류는 어떤 것들을 골라서 사용해야 하는지
등등 나름의 노하우가 다양하다. 특히 음식관련 일들은 전문성이 없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이런 일을 하시는 분들도 쉽게 생각 안 한다. 일 못하는 사람이나 그냥 노동력으로 하는 거다. 요즘은 이런 서비스를 아예 대기업에서 브랜드를 걸고 하는 경우도 있고, 자체적인 교육시스템도 있다. 전문성이 없는 게 전혀 아니다.

아내 혼자서 네 살짜리 한 살짜리를 하루 종일 돌봐야 하는 상황이라는 게 결코 녹록하지 않다. 건장한 나도 왠종일 시달린다 생각하면 한숨이 푹푹 나올 일인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야 비용 지불을 마다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과 편견을 좀 바꿔줬으면 좋겠다. 그게 일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입장이다. 결코 사치를 누리기 위함이 아닌, 생존을 위한 선택이니까.

AND

“여보, 이게 왜 여깄어?”

수저통에 놓인 드라이버를 보고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어, 그거 쓸 일이 있어서.”

“공구함에 두면 되지, 왜 수저 넣는 데 이걸 둬?”

“그냥 그게 편해!”

이해를 못 했다.

 

몇 달후, 처가에 가서 수저를 꺼내려고 수저통을 열고 나서야 아내를 이해할 수 있었다.

2013-07-25 21.15.11

AND

생일인사

생각 2013. 7. 22. 14:02

생일 아침에는 아버지 어머니께 절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아침상으로는 팥밥이랑 미역국을 먹었다. 생일 선물이라고 뭘 받은 기억은 잘 없고, 아마 중학교때 카세트테입과 라디오가 되던 조그마한 오디오데크 하나를 생일 선물로 산게 내 기억에 남은 생일선물 전부.


부모가 되어 아이를 낳아보니, 아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받자고 애를 낳은 게 아니라는 거.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저 존재만으로 고맙고, 있어주니 감사하다.


오늘 아침에도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를 드렸다. 내 나이가 벌써 서른이 넘었고, 나도 애 아버지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네가 있어 참 행복하다' 라고 말씀해주신다. 내가 귀여울 나이도 아니고, 서글서글한 성격도 아니고, 재롱을 부리나 아양을 떠나 뭐 그런 거 없음에도. 그저 나의 존재만으로 기뻐해주시는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 


나는 언제까지 이 감사의 인사를 드릴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봤다. 언젠가 내가 나이가 들면, 부모님도 우리곁을 떠나시고, 그러면 내 생일에 이걸 못해서 허전할 날도 오겠단 생각도 들었다.

AND

마당있는 집

생각 2013. 7. 14. 21:52

아파트와 바꾼 집  살고 싶은 집 단독주택  마흔에 살고 싶은 마당 있는 집


때가 아닌건지 혹은 때가 온 것인지 모르겠으나, 주거고민으로 요 며칠 읽어내려간 책들이다.

땅콩집 책을 광분해서 읽어내려갔던게 벌써 1년도 더 되었구나. 그 사이 이런 저런 책들이 또 시중에 많이 나왔다. 내놓는 대안들이야 모두 다르지만, 핵심은 아파트를 탈출하라는 것. 아마 우리 모두의 마음 한켠에 집이라는 것에 대해 꿈꾸는 이상향이 있을테고,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그 이상향의 모습은 아파트가 아니기에, 이런 책들이 또 읽히고 읽히는 게 아닐까. 나도 지긋지긋하게 아파트만 전전하며 살아온 나의 인생에서, 좀 마당 밟으며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생각해본 게 어디 한 두번이던가. 


단독주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마 나처럼 어린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경우가 많을 거 같다. 아파트 생활하면서 맘놓고 뛰라고 할 수도 없고, 애완동물을 키워보는 경험은 꿈도 못 꾸고, 자연을 '경험시켜야'하는 상황에 놓은 사람들. 그 사람들이 찾는 주택이란 적어도 땅콩집이 타이틀로 내걸었던, 서울 30평대 아파트 전세값으로 뚝딱 해결 가능한 3억 미만의 집일텐데. 그러자면 이런 조건이 필요하다.

- 서울로 1시간 정도 안에 출근 가능할 것

- 주변에 괜찮은 초등학교 정도는 있을 것

- 단독주택 위주의 택지일 것 (원룸촌x)

- 차로 20분 내외에 대형마트 

이 조건들을 충족시키면서 현실적으로 3억 미만에 해결하자면, 땅콩집으로도 간당간당한게 현실이다. 

그래서 맨 앞에 있는 '아파트와 바꾼 집' 이란 책은 이런 시류에 부응하기에는 좀 타겟이 안 맞는다. 차라리 50대 베이비부머들이 안 팔리는 서울집 전세주고, 그 전세금으로 뚝딱 지어서 살 수 있는 집이면 모르겠는데, 그러자면 8억에 10억은 좀 과하다. 4억에서 5억이면 적당할 듯. 타겟이 이래저래 애매하다. 


'살고싶은 집  단독주택'은 이런저런 다양한 케이스스터디가 담겨있어서 좋았다. 내 돈으로 됨직한 것이 무엇이고, 내 돈으로 택도 없는 것은 이런 것이다... 라는 감을 잡는데는 이런 레퍼런스가 필요하다.


'마흔에 살고 싶은 마당 있는 집'은 그냥 신동엽의 러브하우스라고 생각하면 될 듯. 가장 큰 단점은, 결국 노후주택단지 속에 자기만 신식집으로 개조해서 살아야 하는 건데, 단독주택으로 들어가 살면서 이웃과 서로 안면트고 살고 싶고, 동네가 음침하거나 무서울 일 없어야 할 거 같은데, 이런 노후주택이 많은 곳들은 결국 그게 문제. 싸그리 한 열집이 작정하고 러브하우스를 동시에 하지 않는 이상 이 문제도 크리티컬하다.


땅콩집만큼 혁신적인 대안도, 눈이 번쩍뜨일만한 가격도 없었다.

그냥 돈을 빨리 모아야겠다는 생각.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