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방법이 글의 내용에 영향을 줄까?

옛날에 유행했던 가요중에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라는 가사가 있었다.
나는 연필가루가 편지지에 묻어서 번지는 게 싫어서 볼펜으로 쓰긴 했다만, 그것도 중요한 편지 쓸 적에는 다른데 한번 써서 완성해놓고, 그제야 볼펜으로 옮겨 적었다.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글이란 걸 썼던 기억은 중학교쯤으로 생각나는데, 흠모하던 여인네에게 편지쓸 때. 정말 한자 한자 장인의 마음으로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쓰다 틀리면 새 편지지에 새로 썼다. 신기한 건, 그 시절에는 그렇게 써도, 굳이 고칠 필요 없이 글이 제법 잘 나왔는데. 지금은 이렇게 쉽게 고치고 새로 쓰는게 가능한 시절임에도 그런 명문이 안 나온다. 이게 과연 감수성의 차이뿐일까.

도구가 생각에 미치는 영향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은 도구가 인간의 사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서술해주고 있다.


도구가 '중립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도구가 그닥 중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중에 하난데, 도구를 쓰다보면 그 도구에 맞추어 생각하려는 경향이 반드시 생기기 때문이다.

내가 포토샵을 시작한 게 중학교 1학년때인데, 그렇게 한 10년 포토샵을 쓰다가 어느 날 내가 포토샵이 할 수 있는 방법 외에는 그림 그리기를 아예 생각조차 안 한다는 걸 알았다. 아날로그적 느낌이 표현되는 붓터치나 물감의 번짐 같은 것들. 이런 표현들은 포토샵에서 쉽지가 않으니 굉장히 건조한 느낌의 미술학원 구성연습 같은 것만이 내 결과의 전부였던 것.

디자인 공부한 탓에, 이런 경험들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데, 특히 3D 툴을 공부하면 그 툴이 사고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는 걸 깨닫게 된다. surface modeling을 하는 사람과 solid modeling 을 하는 사람. 그리고 그 안에서도 rhino 를 쓰느냐, alias 를 쓰느냐, pro-e 를 쓰느냐에 따라서 아예 형태를 생각하는 방법 자체도 달라져버린다. 도구가 중립적이라고?

해서, 탈(脫)도구적인 생각의 원형을 잘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누군가에게는 스케치가 그나마 그러한 원형에 가까울 수도 있고, 더러는 자신의 수족이 되어버린 툴로도 만족하는 이가 있겠으나, 늘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한다. '이 도구가 내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에 도구를 맞춰본다면?

섬세하고 심혈을 기울이는 글쓰기에 정반대의 글쓰기가 이 책 '아티스트웨이'에 나온다. 한때, 아티스트웨이 따라서 한 두달 아침마다 모닝글쓰기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장기적인 효과는 내가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게 글쓰기를 하고나면 하루가 개운하게 시작되긴 했던 거 같다.


아티스트웨이에서 말하는 글쓰기는 (모든 글을 그렇게 쓰라는 게 아니라) 사고의 유연성을 주고 창조적인 일상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으로서의 글쓰기였다. 방법은. 아주 쉽다. 그냥 생각이 나는 모든 것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거의 한 바닥을 막 써내려가는 것. 생각이 솟아나고 뻗치는 것을 애써 통제하거나 가다듬을 필요도 없고, 글에 주제가 있을 필요는 더더욱 없으며 썼다 지우거나 고치는 건 아예 필요가 없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아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거를 쓸라니까, 도구가 필요하다. 이거 문자를 어떻게 써야하는지를 계속 생각해야한다. 내가 오늘 아침을 빵을 먹었는데, 배가 아직 고프지는 않다. 앞에 나무가 한 그루 있군. 집에 애는 잘 자고 있을까? 난 왜 오늘 갑자기 삘받아서 이렇게 블로그를 열심히 적고 있지? 좀 더 글을 많이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내 옆에 맥킨토시는 잘 쓰지도 않는데... 이거 누구 줘버릴까. 아... 맞다. 통장에 잔고가 많이 없어서 슬프다. 빨리 중고모니터 팔아버려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도구에 사고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 생각에 도구를 맞추는 것이 필요한 경우였다. 생각이 분출되는 속도와 거의 맞추어서 글을 써야하는데, 이러기에는 종이에다 필기구로 적기가 영 불편하다. 타이핑정도가 돼야 거의 비슷한 수준을 맞출 수 있다. 어쩌면 더 빨리 우리가 생각할 수도 있고, 말을 내뱉을 수도 있는데. 이게 타이핑이라는 우리의 선험적 문자표현기법에 갇혀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생각에 맞춰 도구를 선택하려해도, 여전히 선험적으로 획득한 도구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뭔가 새로운 걸 만들어 낼 수는 없으니, 최적의 도구를 고른다는 게 쉽지는 않다. 이 경우, 단지 생각의 속도에 맞춘다는 이유로 타이핑을 했지만, 만약 이 생각을 '글'이 아니고 '그림' 으로 표현했다면? 소리로 표현했다면? 더 만족스런 무엇이 있었을 수도 있다.


도구를 뛰어넘을 수 없을까?



내가 속독이란 걸 잠깐 배워보려고 중학교쯤 책을 사다가 연습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끈기가 있는 편은 아니라서 성공한 건 아닌데, 각종 체험기들만 들어보면 이게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분석해보면,

문자 -> 시각처리 -> 청각처리 -> 의미해석
 

의 과정을 거친다고 볼 수 있다. 속독은. 이 과정에서 '청각처리'를 거의 제거하는 것. '청각'은 철저하게 시간에 종속되는 감각이기 때문에, 이 과정을 빼는게 상당한 속도향상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속독방법들은 '시각처리'를 청각에 종속시키지 않기 위해 거의 '사진 찍듯이' 책을 받아들여서 바로 '의미해석' 으로 넘겨버리는 방식을 권장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뇌가 이렇게 엄청난 시각적 문자입력을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최종적으로는 인간의 신체가 가지는 Hardware perfomance 내에서 얼마만큼의 Software perfomance 를 튜닝하느냐에 따라 능력치가 결정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여기에 컴퓨터를 비롯한 각종 external tool 이 덧붙어서 (어떤 한계를 정하는 것이 아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을 듯.


도구의 function 뿐만 아니라 emotion 도 영향을 미친다

앞서는 도구에 영향을 받는 사고나 그 반대의 경우들을 살펴보았는데, 이것은 주로 도구의 기능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 얘기고, 도구가 지니는 감성적인 부분도 역시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BBS 자료화면이 없어서, PC통신 이미지로 대신...)

내가 대학때만해도, 아직 블로그가 그렇게 활성화되지 않던 시기고, 당시 학교에서는 BBS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주로 사용하던 터미널 프로그램이 '새롬데이터맨98' 이나, 하늘소에서 만든 '이야기' 같은 프로그램들인데, BBS 화면에서 글쓰기에 들어가면 저런 짙푸른 배경이나 검정색 화면에 커서만 덩그러니 점멸되곤 했다. 사실 기능상으로는 현재의 블로그와 크게 다르지가 않은데,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BBS에서 블로그로 쉽게 건너오지 못했던 이유가, '글쓰는 맛이 달라서' 였다. 나도 그랬다. BBS에서 글을 쓰면 뭔가 훨씬 감성적이고 센티한 글들이 써지는 반면에, 블로그에서 쓴 글들은 왠지모르게 딱딱하고 마치 굴림체 10pt 의 날선 도트가 느껴지는 것처럼 건조했다. 이게 도구가 주는 감성의 차이 아니었을까.


결론

도구가 내 사고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은지 수시로 점검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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