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 앉아서

생각 2011. 10. 31. 23:04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하린이 또래정도의 어린 남자아이를 포대기에 둘러업은 할머니 한 분을 보았다. 요즘의 멋쟁이 엄마들과는 달리, 정말 우리 시대에나 볼법한 포대기로 아이를 들쳐업은 할머니는 뒷문 바로 앞자리에 아이를 업은채로 앉아계셨다. 비교적 빠글빠글한 파마머리에 붉은색 비닐잠바, 그리고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파란색 포대기에 생뚱맞은 핸드백이, 보는 나로 하여금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하면서 그냥 살짝 울적한 마음도 든다.

아마도 이 늦은 시각에 시내버스 한켠에 할머니와 함께 오른 그 아이는, 어린이집 한구석에서 어디론가 일을 나간 엄마를 기다리다가 할머니 등에 업혀 돌아오는 길일지도 모른다. 멋쟁이 엄마들이 쓰는 '애기띠'는 오십견으로 고생하는 할머니가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을테고. 

무엇보다 내 마음이 짠했던 것은 아마도 그 아이의 몸놀림 때문이었던 거 같은데, 두어살 짜리라고 보기 힘들만큼 할머니 등에 업혀서, 아니 꽂꽂히 붙어서 어리광하나 없이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마도 그 아이에게 이런 것이 얼마나 익숙한 것이었는가를 되돌아보게 되고, 여태 버스한번 지하철 한번 제대로 탄 적이 없는 우리 집 아이를 떠올려보며 이 풍경이 주는 생경함과 측은함이라는 것이 내게 묘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 집에 자동차가 생긴 것은 내가 초등학교 3,4학년 때였다. 그 전까지는 물론이지만, 그 후로도. 엄마와 어딘가를 나갈 때에는 자가용을 타고 이동하기보다는 시내버스 한 켠에 앉아 30분이고 40분이고 그렇게 이동했었다. 물론, 엄마가 운전을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내가 중학교때 5천원정도 거리를 택시탔다고 아버지에게 무척 혼이 난 걸 보면, 그 때 그 시절에 우리가족은 버스 정도의 대중교통으로 움직이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할머니와 손자의 풍경을 보면서 내가 다시금 놀라는 것은.
내 어릴 적의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그런 모습을 '측은하게' 느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냐면, 그걸 측은하게 느낀다는 것은 나와 그들을 철저하게 타자화 하고 있다는 뜻이고, 은연중에 나와 다른 사람들. 나와 다른 계급이라고 내 머릿속에서 금을 긋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이 충분히 타기 편해서, 그리고 엄마와 아이들이 안전하게 탈 수 있는 환경이 될 수만 있다면야, 내가 이런 복잡한 생각도 안 하겠지. 비가 와도 하나 젖지 않는 지하 주차장에서 카시트에 폭신하게 앉아서 이리저리 오다니는 우리집 아이를 떠올려보면서, 나는 천상 미안하다는 생각만 가지고 버스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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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

생각 2011. 10. 24. 23:44
아, 방금 진중권의 미학 오딧세이 2권을 읽기 시작했는데 대학때 아주 잠깐이지만, 기호학 수업을 들어놓은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사실 요즘 내가 구상하고 있는 작품들도, 어떤 점에서는 이 기호학 비틀기 내지는 기표와 기의를 해체 조합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사실 앞선 작가들이 이런 짓들은 많이들 해놓지 않았나 싶기도.
나는 그런 상황에서 뭘 새로운 걸 할 수 있으려나.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했는데.
마그리트 그림들이 그냥 마냥 초현실인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엄청난 사유. 특히 관념론과 실재론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들어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아... 나의 무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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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성

생각 2011. 10. 17. 23:26
일에 전문성이 생겨야 하는데 이거 내가 전문성이라는 걸 만들어가고 있는 건지 좀 애매할 때가 있다. UI만 줄창 팠으면 UI전문가가 되는 거고, 제품디자인만 줄창 팠으면 또 뭐 그런 게 되는 건데. 아... 이건 이리 찔끔 저리 찔끔 하고 있으니 뭐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게 없고. 나는 제네럴 리스트인가, 어줍자니스트인가.

드러커 아저씨가 뭘 파도 3년씩만 파면 전문가가 된다고 했는데, 세상이 내게 3년씩 주제 바꿀 수 있도록 해주지도 않고, 이건 퇴근 후에 하라는 건가요? 드러커님? 아니면 백수로 살면서 3년씩 공부?

세상 어디에 던져놔도, 누구를 만나도 자신의 전문성을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다. 나도 그런 재주 하나쯤 있음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게임 중에 대항해시대2 가 있었는데, 여기 나오는 캐릭터중에 내가 가장 애용(?)했던 캐릭터가 바로 '에르네스트 로페즈' (좌측 상단)
 

이 캐릭터의 장점은, 굳이 돈을 벌려고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거. 원래 업이 '지도 제작자' 이기 때문에, 그냥 돌아다니고 본국으로 돌아오면 그 즉시 통장에 입금완료. 지금으로 따지면 여행작가 정도? 그냥 돌아만 다녀도 돈이 나와요~

오늘 들은 이 시대의 로페즈 중의 하나는 영미권 네이티브 스피커들. 이들은 그냥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영어전도사'의 역할만 하면, 어디서라도 굶어죽을 일이 없으니 인생을 그냥 여행하듯 돌아다니면 된단다. 게다가 그냥 네이티브인 것을. 새로 뭘 배울 것도 없고. 

의사도 이런 점에서는 좋은 직업이라고 느껴지는 게. 세상 어딜가도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 일감이 없을 리는 없고. 다만 타인의 고통에 평생 노출되는 직업이니 그닥 달갑지만은 않다. 또,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라던지, 악기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다룰 줄 안다면. (아, 이것은 부가가치가 적은가?) 대충 오지에 떨궈도 밥은 먹고 살지 않겠나?

UX 10년하고, 오지에 떨어지면. 굶어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생각이 스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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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의 글쓰기

생각 2011. 10. 12. 08:38
요즘 읽고 있는 책은 나가오카 겐메이가 쓴 '디자인 하지않는 디자이너' 라는 책이다. 엄밀하게 말해선 블로그에 올린 일기 모음 정도인데, 책으로 나왔으니 책이지 뭐.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글의 깊이가 있던 없던, 누가 뭐라 하던 말던 간에. 디자이너가 스스로 글을 쓰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일들을 꾸준하게 해오는 것은 정말정말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여태껏 제대로 못해왔던 일이기도 하고. (아, 근데 나는 디자이너 맞습니까?)

논문쓰던 시절 말고는 하루에 A4 한바닥 정도의 글을 꾸준하게 썼던 기억이 없다. 일기라는 것도 제대로 써내려간 경험이 없고. 꾸준하게 글을 내고 있는 다른 친구들의 블로그를 훔쳐보는 것은 잘 해도, 정작 나는 내 생각을 글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으니, 정리되지 못하고 정체되어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트위터가 좋은 점은 통찰있는 선배들의 한 두 마디 속에 담긴 혜안을 발견하는 것인데, 문제는 그 통찰에 눌려 나의 생각을 드러내질 못한다는 것이다. 읽어낸 텍스트도 적고, 연구자로서의 기간도 부족하고. 디자인에 대한 내 생각을 함부로 꺼낸다는 것이 얼마나 쉽게 공격받는 일인지를 아니까. 그런 냉소 덕분에, 여태 글 한자를 제대로 써내려가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다시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인 것 같다. 누군 처음부터 혜안이 있고 통찰이 있었을까. 

같은 맥락에서 책을 내는 선배들을 보면, 부러우면서도 한 번의 벽을 쌓는 느낌이랄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활자들을 읽어치워야 저 정도의 공력이 쌓이며, 책이라는 것을 내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한때, 은경이는 검프님이 책을 쓰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표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책을 낸다는 것은 다소 무모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예전에 누군가의 말처럼 적진 한 가운데서 벌떡 일어나 '나를 쏘시오' 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논문과는 달리,책은 돈 들여가며 찍어서 또 대중에게 돈 받고 파는 것이니 만큼 돈 값을 해야한다는 부담도 있고. 해천선배님 존경합니다. ㅡ,.ㅡ

여기 블로그에 올라온 observation 들을 책으로 내볼 생각도 오래전부터 했다. 이런 류의 책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고. IDEO에서 출판한thoughtless act 라던지, N
on intentional design (Uta Brandes/Michael Erlhoff공저)같은 것들이 있긴 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관찰은 관찰자의 주관이 포함되는 것이니 만큼, 책으로 나온다고 의미 없는 것은 아닐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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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새로운 것을 제안하는 것이 옳은가?
요즘은 이런 질문에 많이 사로잡힌다. 흔히 말하는 Y+1,2,3 의 개념보다는 '얼마나 대중이 쉽게 포용할 수 있는가?' 또는 '얼마나 많은 새로움을 대중은 한 번에 소화할 수 있는가?' 와 같은 내용.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쉽게 인지하고 사용하는 기능들이 있다. 이를테면 두 손가락으로 화면을 pinch zoom 한다던지 하는 인터랙션은, 굳이 별도의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제 다들 그런 줄로 알고 쓴다. (물론, 이 기능에 대한 소개는 애플의 아이폰 keynote 를 통해서 충분히(?) 설명되긴 했다만)
그런데, 이제와서 보니 그게 참 쉽다는 게지, 설명 없이 아이폰을 산 아무개씨가 그 기능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일 아니었을까? 그럼 그 기능 만든 사람 혼좀 내야하는걸까?

우리가 지금 제안하는 많은 컨셉들도 이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되게 과한 기능이라던지, 자연스럽지 않거나, 어디 깊숙히 들어가야 겨우 trigger 를 찾을 수 있는 그런 기능들까지 '사용자들에게 편리하다' 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비교적 높은 빈도로 우연하게라도 그 기능을 찾을 수 있도록 디자인 되어 있다면, 그 기능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다고 해서 애초부터 탈락되거나 비난 받는 건 좀 부당하지 않나? 또, 애지간한 USP 로 써먹을 만한 경험이라면 굳이 설명을 해가면서라도 사용자에게 이해시켜서 쓰는 게 요즘 세상 아니던가? (갤투의 밀당 기능은 맨 처음 screen 상의 매뉴얼이 작동함)

또 하나의 다른 이슈는, 하나의 신제품에 피로도가 높은 새로움들이 들어차는 것. 이것은 기능 자체가 과하다기 보다는, 기능들의 합이 전달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주의해야할 부분이다. 물론, iOS 는 새 버전마다 자잘한 feature 변경이 200여가지나 된다지만, 실제로 사용자가 체감할 수 있는 것은 10여개 안 팎이고, USP로 강조하는 것은 3~4개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이 사용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새로움의 피로도를 적당 수준으로 맞추기 위함이다. 물론, 이런 줄 알고 샀더니 200여개의 다른 피쳐들이 쉴새없이 튀어나오면 피곤하긴 마찬가지겠지.

아, 오늘도 고민이다.
내부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한 똥 싸다 끊는 듯한 이 컨셉 자르기의 지저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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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디자이너의 역할' 이라고 이름 붙이려다가 생각해보니, 너무 포괄적인가 싶어서 컨셉디자이너라고 이름 붙이기로 했다. 내가 하는 일이 엄밀히 말하면 그런 거니까. 하지만 이노무 컨셉이라는 단어도 워낙에가 뜻하는 바 넓다보니, 누군가 또 검색해 들어와서 잔뜩 오해나 하지 않을런지 모르겠네.

요즘 드는 생각은 우리직군(컨셉디자인, 기획, UX 등)이 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일이 정말 가치있는 일인가? 라는 것.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다소 궁색한) 우리 역할의 근거란 '엔지니어들은 기술만 알고 쓸 줄을 모르니까요', '사용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디자이너 아니겠십니까?' 라는 자신감넘치는 포부였는데, 어째 필드에 나와보니 진짜 엔지니어들은 사용자들도 잘 이해하고 있고, 우리가 입으로 몇달 떠들 사이에 실물이 나와서 이미 굴러가고 있더라.

그 레벨이 안 되는 엔지니어나, 혹은 또 다른 부서의 기획자들은 '너희 디자이너 나부랭이들이 기술이나 시장현황을 제.대.로 알어? 이게 되는 소리야?' 라며, 살가운 대접을 해주고.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ideal 한 경험이에요" 라고 목소리를 먼저 내보고, 잘 안 먹히면 "요정도는 feasible 한 경험이에요" 라고 한발 물러서기 일쑤. 

이게... 회사라는 조직구조의 문제일까?
아님 엔지니어가 너무 사용자 친화적이 되어버린 건가? (아, 여기서 말하는 엔지니어는 회사내부도 있지만, 현세에 같이 숨쉬고 있는 많은 개발자들을 포함한다. 그들은 지금도 모처에서 스마트폰 어플 같은 것을 만들어내고 있고, 사회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갈수록, 컨셉을 만들고 비전을 제시하는 디자이너의 설 땅이 좁아지는 것도 같고.
그 이면에는 '공부 안 하는 디자이너' 들이 있지 않나 (나 포함) 생각도 해본다.

제너럴 리스트가 되라고 부르짖었건만. 이도저도 어줍잖게 하는 어설픈 디자이너가 되었거나, 어디가서 자리 깔아도 먹고 살 수 있을만한 미래적 통찰도 없이 이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것일수도.

원튼, 원치 않든, (하다보니) 3~4년을 현업에서 이짓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끊임없이 되묻지 않고서는 이 일을 온전히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직 답을 못 찾았고, 찾고 있는 중. 아마도 이런 류의 글을 계속 쓰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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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뮤지컬 배우"

생각 2011. 8. 8. 17:05



아마도, 욕보 할머니는 이 배우와 약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있었을 것이다. 뮤지컬 배우였을까? 확실치는 않다. 아마 누군가가 그녀에게 얘기해주었을지도. 파란눈의 외국인이 방문해준 것에 대한 어떤 자부심에 저렇게 큰 액자 속으로 모시어 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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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방법이 글의 내용에 영향을 줄까?

옛날에 유행했던 가요중에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라는 가사가 있었다.
나는 연필가루가 편지지에 묻어서 번지는 게 싫어서 볼펜으로 쓰긴 했다만, 그것도 중요한 편지 쓸 적에는 다른데 한번 써서 완성해놓고, 그제야 볼펜으로 옮겨 적었다.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글이란 걸 썼던 기억은 중학교쯤으로 생각나는데, 흠모하던 여인네에게 편지쓸 때. 정말 한자 한자 장인의 마음으로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쓰다 틀리면 새 편지지에 새로 썼다. 신기한 건, 그 시절에는 그렇게 써도, 굳이 고칠 필요 없이 글이 제법 잘 나왔는데. 지금은 이렇게 쉽게 고치고 새로 쓰는게 가능한 시절임에도 그런 명문이 안 나온다. 이게 과연 감수성의 차이뿐일까.

도구가 생각에 미치는 영향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은 도구가 인간의 사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서술해주고 있다.


도구가 '중립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도구가 그닥 중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중에 하난데, 도구를 쓰다보면 그 도구에 맞추어 생각하려는 경향이 반드시 생기기 때문이다.

내가 포토샵을 시작한 게 중학교 1학년때인데, 그렇게 한 10년 포토샵을 쓰다가 어느 날 내가 포토샵이 할 수 있는 방법 외에는 그림 그리기를 아예 생각조차 안 한다는 걸 알았다. 아날로그적 느낌이 표현되는 붓터치나 물감의 번짐 같은 것들. 이런 표현들은 포토샵에서 쉽지가 않으니 굉장히 건조한 느낌의 미술학원 구성연습 같은 것만이 내 결과의 전부였던 것.

디자인 공부한 탓에, 이런 경험들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데, 특히 3D 툴을 공부하면 그 툴이 사고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는 걸 깨닫게 된다. surface modeling을 하는 사람과 solid modeling 을 하는 사람. 그리고 그 안에서도 rhino 를 쓰느냐, alias 를 쓰느냐, pro-e 를 쓰느냐에 따라서 아예 형태를 생각하는 방법 자체도 달라져버린다. 도구가 중립적이라고?

해서, 탈(脫)도구적인 생각의 원형을 잘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누군가에게는 스케치가 그나마 그러한 원형에 가까울 수도 있고, 더러는 자신의 수족이 되어버린 툴로도 만족하는 이가 있겠으나, 늘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한다. '이 도구가 내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에 도구를 맞춰본다면?

섬세하고 심혈을 기울이는 글쓰기에 정반대의 글쓰기가 이 책 '아티스트웨이'에 나온다. 한때, 아티스트웨이 따라서 한 두달 아침마다 모닝글쓰기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장기적인 효과는 내가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게 글쓰기를 하고나면 하루가 개운하게 시작되긴 했던 거 같다.


아티스트웨이에서 말하는 글쓰기는 (모든 글을 그렇게 쓰라는 게 아니라) 사고의 유연성을 주고 창조적인 일상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으로서의 글쓰기였다. 방법은. 아주 쉽다. 그냥 생각이 나는 모든 것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거의 한 바닥을 막 써내려가는 것. 생각이 솟아나고 뻗치는 것을 애써 통제하거나 가다듬을 필요도 없고, 글에 주제가 있을 필요는 더더욱 없으며 썼다 지우거나 고치는 건 아예 필요가 없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아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거를 쓸라니까, 도구가 필요하다. 이거 문자를 어떻게 써야하는지를 계속 생각해야한다. 내가 오늘 아침을 빵을 먹었는데, 배가 아직 고프지는 않다. 앞에 나무가 한 그루 있군. 집에 애는 잘 자고 있을까? 난 왜 오늘 갑자기 삘받아서 이렇게 블로그를 열심히 적고 있지? 좀 더 글을 많이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내 옆에 맥킨토시는 잘 쓰지도 않는데... 이거 누구 줘버릴까. 아... 맞다. 통장에 잔고가 많이 없어서 슬프다. 빨리 중고모니터 팔아버려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도구에 사고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 생각에 도구를 맞추는 것이 필요한 경우였다. 생각이 분출되는 속도와 거의 맞추어서 글을 써야하는데, 이러기에는 종이에다 필기구로 적기가 영 불편하다. 타이핑정도가 돼야 거의 비슷한 수준을 맞출 수 있다. 어쩌면 더 빨리 우리가 생각할 수도 있고, 말을 내뱉을 수도 있는데. 이게 타이핑이라는 우리의 선험적 문자표현기법에 갇혀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생각에 맞춰 도구를 선택하려해도, 여전히 선험적으로 획득한 도구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뭔가 새로운 걸 만들어 낼 수는 없으니, 최적의 도구를 고른다는 게 쉽지는 않다. 이 경우, 단지 생각의 속도에 맞춘다는 이유로 타이핑을 했지만, 만약 이 생각을 '글'이 아니고 '그림' 으로 표현했다면? 소리로 표현했다면? 더 만족스런 무엇이 있었을 수도 있다.


도구를 뛰어넘을 수 없을까?



내가 속독이란 걸 잠깐 배워보려고 중학교쯤 책을 사다가 연습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끈기가 있는 편은 아니라서 성공한 건 아닌데, 각종 체험기들만 들어보면 이게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분석해보면,

문자 -> 시각처리 -> 청각처리 -> 의미해석
 

의 과정을 거친다고 볼 수 있다. 속독은. 이 과정에서 '청각처리'를 거의 제거하는 것. '청각'은 철저하게 시간에 종속되는 감각이기 때문에, 이 과정을 빼는게 상당한 속도향상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속독방법들은 '시각처리'를 청각에 종속시키지 않기 위해 거의 '사진 찍듯이' 책을 받아들여서 바로 '의미해석' 으로 넘겨버리는 방식을 권장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뇌가 이렇게 엄청난 시각적 문자입력을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최종적으로는 인간의 신체가 가지는 Hardware perfomance 내에서 얼마만큼의 Software perfomance 를 튜닝하느냐에 따라 능력치가 결정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여기에 컴퓨터를 비롯한 각종 external tool 이 덧붙어서 (어떤 한계를 정하는 것이 아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을 듯.


도구의 function 뿐만 아니라 emotion 도 영향을 미친다

앞서는 도구에 영향을 받는 사고나 그 반대의 경우들을 살펴보았는데, 이것은 주로 도구의 기능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 얘기고, 도구가 지니는 감성적인 부분도 역시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BBS 자료화면이 없어서, PC통신 이미지로 대신...)

내가 대학때만해도, 아직 블로그가 그렇게 활성화되지 않던 시기고, 당시 학교에서는 BBS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주로 사용하던 터미널 프로그램이 '새롬데이터맨98' 이나, 하늘소에서 만든 '이야기' 같은 프로그램들인데, BBS 화면에서 글쓰기에 들어가면 저런 짙푸른 배경이나 검정색 화면에 커서만 덩그러니 점멸되곤 했다. 사실 기능상으로는 현재의 블로그와 크게 다르지가 않은데,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BBS에서 블로그로 쉽게 건너오지 못했던 이유가, '글쓰는 맛이 달라서' 였다. 나도 그랬다. BBS에서 글을 쓰면 뭔가 훨씬 감성적이고 센티한 글들이 써지는 반면에, 블로그에서 쓴 글들은 왠지모르게 딱딱하고 마치 굴림체 10pt 의 날선 도트가 느껴지는 것처럼 건조했다. 이게 도구가 주는 감성의 차이 아니었을까.


결론

도구가 내 사고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은지 수시로 점검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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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

생각 2011. 5. 8. 23:50
평범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 두렵다.

남들과 똑같이 살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 하면서 후회하는 것.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던 그 옛날의 기억들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가정이라는 이름의 울타리 안에서
많은 사람들의 변명처럼 그렇게 쉽게 포기해버리는 것이 맞는 것일까.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거창하게 들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지구 어느 한 모퉁이라도. 잘 못 놓인 것이 있다면 바로 놓는 정도면 족할텐데.
평생을 살다가, 그 작은 '옳은 일' 하나 못 하고 죽는 사람은 왜 그렇게 많을까.

내일도 나는.
옳지 그른지도 알 수 없고, 세상에 나올지 말지, 종이 몇 장 속에서 잠깐 회자되었다 사라질 이야기를 쓰러 간다. 세상을 바꾸는 일과 하루 멀어진다. 

이런 것이 급진적인 생각이라 불리운다면. 좋다. 나는 급진적인 생각을 하고싶다.
세상을 바꾸는 일에, 하루라도 일찍 발을 담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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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현이 또 심금을 울리는 노래를 하나 불러주었다.

박정현이 노래를 잘 한 것도 있지만, 곡이 원최 좋아서 집사람이랑 들으면서도, '아... 곡이. 가사가 너무 아름답구나...' 하면서 서로 공감 일백프로.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작사:박주연 작곡:조용필)
 

나는 떠날때부터 다시 돌아올걸 알았지
눈에 익은 이자리 편히 쉴수 있는 곳
많은 것을 찾아서 멀리만 떠났지
난 어디 서 있었는지 하늘높이 날아서
별을 안고 싶어 소중한건 모두 잊고 산건 아니었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그대 그늘에서 지친마음 아물게해
소중한건 옆에 있다고 먼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너를 보낼때부터 다시 돌아올걸 알았지
손에 익은 물건들 편히 잘수 있는 곳
숨고 싶어 헤매던 세월을 딛고서 넌 무얼 느껴왔는지
하늘높이 날아서 별을 안고 싶어 소중한건 모두 잊고 산건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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