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생각 | 47 ARTICLE FOUND

  1. 2013.03.05 왜. 나는. 지금. 이. 일을.
  2. 2013.02.19 UI 목업툴 의미있나.
  3. 2013.02.19 3D printing 킬러앱이 없는게 문제
  4. 2013.02.15 구글트렌드에 네이버를 넣으면?
  5. 2012.12.16 공산주의의 반대말은?
  6. 2012.12.13 노는 것
  7. 2012.10.26 design by logos 1
  8. 2012.09.18 부모에 대한 두려움
  9. 2012.09.12 오래가는 책
  10. 2012.09.07 Hint

힐링캠프 한석규편을 보는데, 한석규가 그런 질문을 한다.

"나는 왜 연기를 시작했는가?"

그리고 한석규는 수시로 후배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넌 왜 연기 시작했니?"


근데, 사실 이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잠시 멈춰서서 매 순간 던져야 할 질문이 아닌가 싶다. "나는 지금 이 일을 왜 하고 있지?". 무엇을 계기로 나는 지금 이런 일을 하고 있는걸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없이, 쳇바퀴 돌듯 살아가면 한참 뒤에 가서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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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I 목업툴 의미있나.

생각 2013. 2. 19. 17:56

balsamiq 같은 류의 UI 목업 툴들이 이래저래 많이 쏟아져 나오는 거 같다.

오늘 써본건 www.fluidui.com 인데, 괜찮다 싶다가도 역시 한계를 느낌.


디자이너한테 필요한 프로토타입이라는게 어떤 수준인가?

개발자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을 전달하는 게 목적이라면, 현존하는 UI 목업툴은 디자이너보다는 동작기술서를 작성하고 싶어하는 누군가에게 어울릴 듯. (물론 디자이너에게도 이런 역할이 있지만)


근데, 그렇게 놓고 보자면 동작기술서를 파워포인트가 아닌 UI 목업툴로 만드는게 그렇게 의미 있는지 모르겠다.   


- 더 시간이 많이 걸리고 (파워포인트가 익숙한 사람에게는)

- UI element 가 매우 제한적이며 (템플릿에 있는 것만 쓸 수 있으니)

- 범용적인 포맷이 아니며 (따라서 여러 사람에게 공유하기 어렵다)

- 결국 디테일한 화면 디자인을 전달할 목적은 달성할 수 없음.


따라서 이런 UI 목업툴들이 결국 매우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쓰일 수 있다는 게 현재까지의 내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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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프린터가 가정용으로써 의미가 있을까?


매스마켓을 먹으려 들려면, 2D 프린터 만큼 보급되어야 하는데, 2D 프린터가 가졌던 킬러앱 - 문자 입력과 출력 - 에 견줄만한 그 무엇이 없다.


일반인이 3D 데이터를 만들어 내는 것부터가 문제다. 아무리 쉬운 저작툴이라도, 키보드로 글 몇자 뚝딱이는 것과는 비교도 못할만큼 어려운 일이다. 

대안으로 자작이 아닌 copy 는 가능하겠다. 스테레오 카메라를 쓰던, 아니면 모노 카메라로도 요즘은 입체를 떠내는 기술이 가능하니까.

헌데, 기존에 있는 사물의 형태를 그저 본뜨는 것 정도가 킬러앱이 될 수 있나? 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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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부터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는 ‘naver’ 라는 검색 키워드가 의미하는 바는.

저 그래프만큼 안드로이드 기기가 퍼져나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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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를 반대한다면서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안타깝다. 


공산주의는 반대의 개념이라는 게 없다. 사회를 굴러가게하는 여러 정치이념중의 하나일 뿐이다. 자본주의라던지 사회주의라던지 하는 정치방식 중의 하나다. (물론, 공산주의는 이미 실패한 정치임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다시 실험되어서도 안될 방식이다.)


만약 당신이 민주주의를 지지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반대할수 있는 개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독재'다. 

독재는 공산주의 국가에도 있을 수 있고, 자본주의 국가에도 존재할 수 있다. 독재자들도 자신들의 정당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문제는 그런 정당이 하나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1당 독재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고, 북한에 있다는 '노동당'이 대표적이다. 


대한민국도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이루어가고 있지만, '독재'가 없는 '독재'청정지역이 아니다. 마치 어둠이라는 것은 빛의 부재를 의미하듯이, 허울뿐인 민주주의는 '독재'를 자연스레 불러들인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에게 사회수업을 다시 해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깨부수자 공산주의"를 외치시는 분들에게는 "자본주의 한잔 하세요" 라고 말씀드리고 싶을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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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것

생각 2012. 12. 13. 00:52

가끔은 노는 것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 고민해볼 때가 있다. 뽀로로가 말하는 ‘노는게 제일 좋아’ 라는 고백. 나라고 뭐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날 인물은 못 되지만, 나는 나 스스로, 혹은 남들과 잘 놀고 있는지?

요즘은 놀아줘야 하는 대상이 많다. 아내와도 놀아야 하고, 딸과도 놀아야 하고, 직원들과도 놀아야 한다. 친구들과 놀아주는 것은 가정이 생긴 후로는 좀 쉽지가 않은데, 아마 내 친구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별 신경을 안 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이 다양한 대상과 놀아줄 때, 나 역시 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그렇다’ 가 답이면, 같이 놀았던 것이고, ‘아니다’가 답이면, 놀아주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딸아이와 노는 것은 사실 내 수준에서는 ‘놀아주는’ 것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아빠는 왕자님해, 나는 공주님이야” “우리 결혼식 놀이하자” 라며 좁은 방 이끝에서 저끝으로 달리는 웨딩마치의 반복을 내가 즐기는 ‘놀이’로 승화시키지 못한 까닭이다. 아내와의 놀이는 같이 수다를 떨면서 차를 마시고 드라마를 보거나 쇼핑을 하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그래도 어느정도 나와 죽이 맞는 편이니 이런 것은 나도 ‘놀았다’ 고 볼 수 있다. 친구들과 가끔 만나서 차마시고 밥먹고 노래방가고 하는 종류의 놀이 역시 유효한 편이기는 한데, 정확하게 ‘어떤 친구냐’가 또 놀이의 퀄리티를 좌우한다. 여기까지는 어찌됐든 놀아줄 수가 있다.

문제는 더 놀아주기가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다. 문화적 차이라고 봐야 하는 것인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의 ‘놀이’가 나에게 ‘놀이아님’ 정도가 아니라 ‘일탈’ 이라거나 ‘배신’ 이라는 키워드로 대치될 때다. 이때는 미안하지만 그들의 놀이를 같이해줄 방법이 없다. 나 혼자 지루하고 재미없는 거면 상관 없지만, 이 놀이의 영향이 나 하나를 벗어나 누군가에게로 뻗어나갈 것을 알때, 이 ‘놀이’는 중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논다’ 라는 것의 의미. 그 끈끈한 유대감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또 다른 구석에서 몰려온다. 이래저래 난처하다.

나는 혼자서 제법 잘 놀았다. 형제도 없었고, 혼자 산 시절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같이 놀아야 한다. 나이 서른에 같이 노는 것을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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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by logos

생각 2012. 10. 26. 21:38
요즘 css작업을 거의 맨날 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데, 무엇보다도 '재미'를 느끼는 작업이라 즐겁다. 이게 소위 말하는 design by numbers 에 제법 근사한 작업인데, processing 이나 flash AS 만큼의 visual expression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하는 것들을 그려내는데 큰 무리가 없다.

사실 웹이라는 것은 상당부분 정보를 전달하고, 사용자와 인터랙션을 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디테일한 그래픽에 꼭 의존할 필요는 없다. 되려, 웹표준에 의거하자면, 이미지가 하나도 없어도 웹을 사용하는데 문제가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적당히 영역을 긋고, 그 위에 정보(글자)를 올리고, 버튼을 만들고, 그걸 누름직하게 만들어주고 하는 작업들은 이제 css만으로도 충분하다.

과거 포토샵에서 해야만 가능했던 온갖 shadow 효과, gradation 같은 것들이 이제 코딩으로 모두 해결이 되니까, 포토샵 없이도 상당부분의 이미지는 만들어낼 수가 있다. 또 코딩은 언제라도 그 수치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픽셀 기반의 노동이 가져오는 비가역성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어서 좋다. 또, 복제와 재사용이 용이하다는 점도, 이미지 소스 의존도를 최대한 낮추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이것은 또 하나의 문제를 초래하게 될테지만, 그건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둘째로, 이 작업이 재밌는 이유는 '상대값에 의한 관계적 디자인' 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건 꼭 css라서 라기보다는 html + CSS 의 조합이라고 봐야하겠다.
parametric design 이란 용어자체는 사실 design by numbers 와 거의 동일한 얘기지만, 이 용어를 많이 쓰던 곳은 제품디자이너들의 3D modeling 툴에서다. 내가 애용하는 rhino 3d 같은 디자인 툴이 이런 parametric design 을 지원하지 못하는 ㅠㅠ 싼 툴이고, 고급 툴로 갈수록 이런 parametric design 을 철저하게 지원하고 있다. parametric design이 가능한 툴을 썼을 때, 비로소 이러한 '상대값 기반의 관계적 디자인' 이 가능해지는데, 예를 들면 이런거다.

휴대폰을 디자인 한다고 했을때, 가로 60mm, 세로 120mm 에 두께가 9mm 인 형상을 만든다고 치자. (보통 실무에서는 왠 종일 걸려야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데 최종 결정권자가 와서는 "이거 두께를 0.5mm만 줄이지" 라고 얘기하면, 과연 이 작업을 다시 시작해야 할까?

▲ 이런 느낌?


내가 rhino 3d 로 작업을 했다면, 아마 n 시간을 들인 만큼 처음부터 n 시간을 투입해야 하겠지만, pro-e 나 solidworks 를 썼으면 (그리고 관계적 디자인을 매우 잘 설계했다면) 수치하나만 조절하면 모든 형상들이 re-generated 된다. 


css작업도 마찬가지다. 워낙에 사용자가 마주할 환경이 다이나믹 한 것이 웹이다보니, 그 예측못할 수 많은 상황에 responsive 하게 디자인되려면, 이런 관계적 설계를 디자인에 많이 도입해야 한다. 가령 화면은 가로폭이 1024px이 될 수도, 700px 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만큼의 flexibility 가 요구된다. 글상자의 폭을 무작정 700px로 맞춰놓아버리면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가 어렵다. 여백이 남거나, 화면이 잘리게 된다.
그러니 화면폭에 맞추어서 몇% 수준으로 설정한다던지, 폭을 꽉 채운 상태로 가장자리로부터 얼마간의 padding 을 준다는 식의 관계적 설계를 해놓는것이다. 이렇게 하면 글상자의 크기는 언제나 화면에 종속되게 되므로, 내가 원하는 모양새를 유지하기가 쉽다.

마지막으로 이게 재미있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high-effectiveness'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몇 kb의 용량을 줄이려고 이미지 사용이 꺼려지는 웹디자인에서 css는 축복이다. 글자 몇 줄이면 몇 kb에 달하는 그라데이션도 해결할 수 있고, animation 도 가능하다. 물론 이걸 다 rendering해주는 브라우저가 있으니 감사한 일이지만, 디자이너는 이미지 용량 줄인다고 고생 안 해서 좋고, 또 아무리 확대를 해도 깨지지 않을 robust한 visual 을 가지게 되니 좋다. 애니메이션 만든다고 플래시 삽질을 안 해서 좋고, 다 만들어놓고 수정한다고 그래픽 툴 버벅대며 열 필요도 없다. 결국 시간을 버는 셈이다.

물론, 이 작업이 가지는 여러 어려움들이 여전히 산재해 있는 것은 사실이고, 개선의 여지도 무지하게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결국 디자인이 logos(말)로 다 가능하다는 것이, 조금씩이나마 증명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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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 대한 두려움

생각 2012. 9. 18. 10:07

주말에 하린이를 혼낼 일이 있어서, 따끔하게 주의를 줬다.

목사님 말씀 중에 단상 앞을 왔다갔다 하면서 제멋대로 소리를 지르고 다니길래 몇 차례 주의를 줬는데 멈추질 않았다. 옆에 있던 삼촌이 조용히 불러 타이르는 것도 듣질 않고 구제불능이기에, 하는 수 없이 데리고 나갔다.


매를 때릴까 싶다가도, 워낙 매 앞에서는 또 경기를 하는 탓에 그저 위협으로나 들고 있을 뿐이고, 엄하게 말로만 타이르는데 (사실 때가 되면 때리는 것도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녀석이 '엄마 아빠 무서워~' 하면서 운다.


"그럼, 무서워야지! 내가 네 친구니? 아빠 엄마는, 하린이가 잘못하면 혼도 낼 수 있는거야!"


순간적으로 내입으로 한 말이지만, 사실 이건 오래 전에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이다. 언젠가 내가 '다른 집 친구들은 아버지가 친구처럼 대해준다던데, 아버지는 좀 안 그런거 같아요' 라고 말하자, 아버지가 그러셨다. '세상에 친구는 많다. 하지만 아버지는 하나뿐이잖니. 그러니 나는 친구같은 아버지는 되어줄 수 없구나.' 

이걸 곧이 곧대로 해석하면 아버지가 참 구식이구나... 싶지만. 지나서 생각해보면 굳이 그렇게 오해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친구처럼 살가운 아버지도 얼마든지 있을 수는 있지. 하지만, 친구라는 특수성에는 어느 누가 위계를 잡지도 훈계를 할 수도 없다는 일종의 사회적 계약이 있는 것이다. 아마 아버지는 이런 류의 계약 때문에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못하게 되는 것을 걱정하신 게 아닐까 싶다.


무섭다는 것. 우리는 왜 이것을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가? 아이가 부모를 두려워하는 것이 왜 잘못되었다고 말하는가? 무서운 것도 정도가 있는 것이고, 종류가 있는 것인데, 부모에 대한 모든 두려움과 경외감을 잘못된 것으로 치부한다면, 요즘같은 세상에 대체 애가 무서워 할게 뭐가 있나. 선생이 무섭길 하나, 목사님이 무섭기를 하나. 부모조차도 무서운 존재가 되지 못하면 애가 삐뚤어지는 건 불보듯 뻔한 게 아닌가. 나는 그런 관점에서 부모는 두려워 할만한 마지막 보루라도 되어야 아이의 인생을 바로잡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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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가는 책

생각 2012. 9. 12. 23:34

책은 많은데 읽고 싶은 책을 찾기가 어렵다.

서점엘 가도, 도서관에 가도. 이래저래 뒤적거리기만 할뿐,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시간은 한정되어있으니, 쓸데없는 활자들로 내 아까운 시간을 버리기도 싫고, 고심이다.


현혹적인 메세지들로 겉을 장식한 책들이 쉴새 없이 쏟아지는데, 그럴 수록 나는 고전에 좀 더 관심이 간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세월의 무게에도 여전히 읽혀지는 그런 책들. 그런 책들이야 말로, 몇 개월, 몇 년이면 스러져갈 책들에 비해 시간 투자가 별로 아깝지 않다.


솔로몬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해 아래 새 것은 없다고.

책도 그렇다. 오랜 세월 살아남은 지혜의 책 몇 권이면, 굳이 시절에 편승한 트랜디한 책이 없어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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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t

생각 2012. 9. 7. 13:20

회사 빌딩이 낡아서 그런거라고 생각했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면 엘레베이터가 아직 다 멈추지 않은 상태. 그러니까 내려가던 것은 아직 덜 내려왔고, 올라오던 것은 아직 덜 올라온 상태로 문이 열린다. 그 차이가 그리 심하지 않기 때문에 다들 큰 놀라움 없이 타고 내리지만, 대략 5~10cm 정도 높이가 안 맞은 채로 열려서 스르르 하고 제자리에 온다.


그런데 오늘 이 후져보이는(?) 엘레베이터의 개폐가 사용자에게 도움이 되는 나름의 힌트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가끔 엘레베이터를 잡으면 내려가려고 부른 엘레베이터가 여전히 다른 탑승자들 때문에 올라가야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문 열린 것만 보고 덥석 타고는 아차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바로 여기에서 저 개폐방식이 도움이 된다. 내가 불시에 맞딱 드리는 status 에 대해서 그 이전의 status 를 알아야 할 경우, 그에 대한 힌트가 보이는 것이 사용성에 있어서는 좋은데, 바로 이 덜 맞춰진 채로 문이 열린 엘레베이터가 그 힌트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방법 외에도 엘레베이터 표시등을 본다던지 하는 다른 방법이 많으나.

오늘 나는 휴대폰 쳐다보느라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서야 허둥댔고, 그 힌트 덕분에 엘레베이터에 잘못 타는 실수를 하지 않은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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